“팔만대장경 만드는 마음으로 ‘태조실록’ 첫 영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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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을 영어로 번역한 최병현 호남대 교수. “고전 한류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우리 인문학의 수준은 한층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호남대]

“중국 고전 사서(四書) 삼경(三經)은 19세기 말 선교사 제임스 레게에 의해 번역돼 일찌감치 세상에 알려졌죠. 우리는 이런 운이 없었어요.”

 이달 말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총 15권)의 첫 영어 완역판을 내는 호남대 최병현(62·영문과) 교수의 말이다. 2010년 “한국의 혼을 밝혀줄 선조들의 지적 작업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김병국 당시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현 국립외교원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시작한 ‘태조실록’ 영역 작업. 2년여 주말과 방학까지 온전히 바쳐 작업에 매진한 그는 “제2의 팔만대장경을 제작하는 마음처럼 경건하게 임했다”고 했다.

 최 교수가 펴낸 ‘태조실록’ 완역판은 주석까지 포함할 경우 1200쪽, 단어수로는 40만 단어에 이르는 대저작이다. 무엇보다 건국 이후 첫 영어본이라는데 의미가 크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영어로 읽어보면 한글보다 더 쉽게 이해된다고 하더군요. 세계화 시대, 세계화되지 않은 문화유산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고전의 세계화는 한국의 인문학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지렛대가 될 것입니다. 전 세계에 나가있는 유학생이 10만 명이나 되지 않습니까.”

 최 교수는 『조선왕조실록』 작업을 하기 이전에, 우리 고전 영어 번역작업으로 명성을 높였다. 2001년 국보 132호인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영문 제목: The Book of Corrections)을, 2010년에는 공직사회의 바이블인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Admonitions in Governing the People)를 영어로 번역했다. 세계 명문대학 텍스트로도 활용되고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에선 목민심서를 소재로 한 논문도 나왔다. 인터넷 서점 아마존의 징비록 서평도 볼만하다. “윈스턴 처칠의 제2차세계대전 회고록을 무색케 하는 고전” 등 호평이 가득하다.

 최 교수는 1998년 미국 메릴랜드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던 중 번역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당시 외환위기 직후라 ‘왜 이 위기가 일어났고, 왜 역사가 되풀이되는가’에 대한 선조들의 경고를 들어보자 생각했죠. 그래서 시작한게 『징비록』 번역입니다.” 버클리대의 루이스 랭카스터 교수(불교철학)가 힘을 실어주고 출판사도 주선했다. 이번 ‘태조실록’ 번역문은 내년 초 한국국제교류재단과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도 실린다.

 최 교수는 “‘팔만대장경’은 고려 때 몽고침입을 받는 전쟁통에서도 15년 걸려 완성한 기록”이라며 “평화로운 이 시기, 후학들이 세종실록 등 『조선왕조실록』 전편을 모두 완수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국 고전의 세계화 작업은 이제 막 시작됐습니다. 국제사회에 ‘고전 한류’의 물결로도 이어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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