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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얼할 때까지 두들기고 뿜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83호 31면

내 작업실 줄라이홀의 3면을 13조의 스피커가 둘러싸고 있다. 스피커들마다 각기 다른 소리가 난다. 모두 최소한 50년은 넘은 기기들이다. 거기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예쁘고 고운 성향의 소리가 아니라는 것. 클랑필름 유러딘은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소리가 나고, 젠센의 임페리얼은 둔탁한 소리를 낸다. 일렉트로 보이스의 아리스토크랫은 어딘가 목이 잠긴 듯한 음색이고 보작 B-200X의 소리는 무겁기만 하다. RCA의 LC-1A도, 로저스 초기 실험작도, JBL 대형 풀레인지도, 알텍 755A도, 텔레풍켄 나비 댐퍼 빨간 배꼽도, 굿맨 액숌도….

詩人의 음악 읽기 치명적인 한 방-틸만 수사토의 르네상스 무곡( Dansereye 1551)

그중 15년 가까이 씨름을 하고 있는 선수가 하츠필드 스피커(위 사진)다. 아메리칸 사운드의 대표주자, 이른바 인류가 만든 3대 걸작 스피커의 하나라는 명성, 1970년대 음악감상실 ‘르네쌍스’의 메인 스피커로 활약했던 그 위용. 그런데 좋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어떤 앰프를 매칭시켜도 저음 부족으로 거칠고 날것의 생경한 소리를 낸다.

몇 개월간 한 건축가의 도움을 얻어 마침내 최근에 하츠필드의 고질적인 저음 부족을 해결했다. 아마 오디오 동네 사람을 만난다면 그 이야기로 드라마틱한 장광설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EL156 진공관을 PP로 구동하는 텔레풍켄 V311 앰프에다 1930년대 독일계 멀티 매칭트랜스를 부착하니 비로소 저음이 터져 나오더라. 선재는 주석선 대신 7N 구리 소재를 사용하는 일제 아크로텍으로 변경했고 트랜스 위치를 스피커 터미널 쪽으로 옮겨 부착하고 앰프 초단관들을 독일 계통에서 영국제 멀라드로 교체하고….

하지만 가까스로 소리의 밸런스가 잡힌 하츠필드 역시 예쁘고 고운 음색과는 거리가 멀다.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소리와 같다고나 할까. 신발이며 재킷이 주인을 닮아가듯이 내가 오랜 세월 걸려 구축한 음향공간에서 스피커들은 누구를 닮아 아름답게 울리지 않는다. 예쁜 소리를 원했다면 프레스티지급 탄노이 스피커를 구입해 한 방에 해결했을 것이다. 또 다른 선택지도 얼마든지 있었다.

남자가 미인에게 혹하듯이 미혹의 사운드를 안겨주는 선택 기회가 그토록 많았건만 어째서 최종 결정 시에는 비켜나 버리는 것일까. 음반 구입에서도 비슷한 성향이 작용한다. 어쩔 수 없이 수량이 많아지는 바흐나 모차르트 등을 제외한다면 바르톡, 프로코피예프, 스트라빈스키류의 음반이 과하게 많다. 거친 소리와 난해한 음악을 특별히 사랑하는 걸까? 스스로 물어봐도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황홀할 정도로 영롱한 음색을 조심조심 뿜어내는 귀족적인 오디오 시스템과 마주치면 넋을 놓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줄라이홀과는 비교할 수 없이 조촐한 시스템을 갖추고서도 언제나 고혹적인 미성을 자아내는 한 친구의 작업실을 들를 때면 부러움에 군침을 흘린다. 그리고 자학을 한다. 대체 나는 어떻게 생겨먹은 작자인고?

최근에 알게 된 어떤 사람은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자기 얘기만 한다. 첫날에 이미 살아온 내력 대부분을 파악할 만큼 그는 말이 많았다. 나는 그 귀엽게 늙은 상대에게 병명을 지어줬다. 자아확장증이라고. 아마 상대방은 모를 것이다. 내가 똑같은 병통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저 조증으로 방방 뛰며 한없이 확장된 자아가 찾는 것은 무얼까. 하염없이 기괴한 음반을 구입하고 거칠고 통제하기 힘든 스피커를 사고 또 사고 지쳐 자빠졌다가 또 일어나 같은 짓을 반복하는 심리의 계곡에는 무엇이 숨어있을까. 나는 그것을 알 것 같다. 그리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치명적인 한 방’을 구하는 심리라고.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다. 스스로 이해하거나 납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무자각적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길을 실제로 간다. 모든 인생의 결과물은 그래서 더 나은 것이나 못한 것이 없을 것이다. 어쨌든 스스로 제 발로 찾아 걸어간 길이니까. 그 도정이 쾌적한 것을 못 참는 성정, 바람 불고 벼락 치고, 낡은 스크린에서는 비가 죽죽 내리고 여기저기 버려진 더러운 물건들, 더 더러운 기억들, 원망과 비난과 자학과… 오자처럼, 탈자처럼 문법이 어그러진 삶의 방식은 그러나 남이 모를 꿈으로 늘 충만하다. 언젠가는, 정말 언젠가는 치명적인 한 방과 맞닥뜨릴 것이니까. 그걸 만나기 위해 전생이 쓰인 것이니까.

하츠필드 스피커의 음향이 대폭 바뀐 후에 우연히 걸게 된 음반을 반복해서 듣고 있다. 틸만 수사토(Tielman Susato·작은 사진)의 고음악 ‘르네상스 무곡(Dansereye 1551)’이다. 타악기는 두들기고 관악기는 뿜어댄다. 온몸이 얼얼할 때까지 두들기고 뿜어댄다. 종종 느끼지만 르네상스기 음악과 현대음악은 속성이 비슷하다. 도취의 열광에 빠지기에 저렇듯 단순하게 밀어붙이는 사운드가 제격인데 이것도 과연 음악감상인지는 잘 모르겠다. 착각일까. 지금 울리는 저 중세의 나팔소리 합주가 자꾸 이렇게 들린다. 치명적, 치명적, 치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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