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최경주에게 거대한 야망 품게 한 이상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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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호 23면

아름다운 키아와 아일랜드의 오션 코스.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최경주(42·SK텔레콤)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여름 태양 볕도, 바로 옆자리에서 있는 힘을 다해 스윙하는 장타자 버바 웟슨(34·미국)의 날카로운 드라이버 파열음도 그의 상념 속으로 숨을 죽였다.

PGA챔피언십 열리는 키아와 아일랜드

1997년 11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인근의 키아와 아일랜드.

국가 대항전인 월드컵 골프 출전차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아 본 최경주는 드라이빙 레인지에 들어서서 깜짝 놀랐다. 연습장 타석이 인공 플라스틱 매트가 아니라 잔디였기 때문이다. 평범한 잔디도 아니었다. 카펫을 깔아놓은 것처럼 매끈했다. 당시 한국의 그린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는 “잔디 연습장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 해봤기 때문에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고 했다. 다른 선수들이 있었다면 그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했겠지만 연습장에는 한국 대표인 최경주와 박노석뿐이었다.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보겠다고 다른 나라 선수보다 일찍 대회장에 온 터였다. 영어를 거의 못 했기 때문에 골프장 관계자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최경주는 함께 참가한 박노석에게 “형, 여기 연습장이 맞긴 한데 잔디를 손상시키면 안 되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박노석도 고개를 끄떡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페어웨이에서도 디벗을 크게 내면 골프장 측으로부터 구박 받을 때였다.

페어웨이 디벗 안 내려 노심초사
두 선수는 잔디에 디벗을 내지 않도록 공만 살짝 떼어 내는 식으로 공을 쳤다. 그게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지만 나라 체면 때문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 최경주는 “국가 대항전이라 코스에 태극기도 펄럭이고 있는데 우리가 융단 같은 잔디를 파 버리면 골프장에서 쫓겨나고 나라 망신시킬 것 같았다”고 말했다.

다음날 최경주는 연습장에 나타난 프랑스팀 선수들이 손바닥만 한 뗏장을 날리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저 좋은 잔디를 막 날려버려도 되나 싶었는데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어 내가 말리고 싶을 정도였다”고 그는 말했다. 전날 디벗을 안 내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두 선수는 이날은 빈대떡만 한 뗏장을 날리면서 한을 풀었다. 최경주는 “박노석 선배와 뗏장을 누가 더 크게, 멀리 날리나경쟁도 했다. 그 일대를 다 파버렸다”고 했다.

최경주는 “신세계를 발견했고 마음에 뜨거운 장작불이 타기 시작했다. 그 열정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반드시 이 꿈의 리그에 진출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최경주 메이저 우승 꿈 완성될까
15년이 흘렀고 최경주는 다시 이 땅에 섰다. 올해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PGA 챔피언십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인근의 럭셔리 리조트인 키아와 아일랜드의 오션 코스에서 치러지고 있다. 골프장은 약간 변했다. 기괴하게 휘어진 코스의 나무들은 조금 더 자랐고 클럽하우스와 연습장의 위치도 바뀌었다. 최경주는 “당시엔 비교적 편한 코스였는데 몇 개 홀에 날카로운 이빨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키아와 아일랜드는 그에게 의미가 크다. 시커멓게 탄 피부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져 ‘필드의 타이슨’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야망의 청년에게 거대한 욕망과 꿈을 품게 했던 이상향 같은 곳이다.

코스는 매우 아름답다. 천재 설계가 피트 다이가 만든 오션 코스는 그린피가 400달러에 육박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빛은 인상파 화가처럼 대서양, 호수와 러프들을 새롭게 해석한다. 비바람이 불면 코스는 매우 어렵다. 미국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라는 말도 나온다. 최경주는 오히려 악천후를 원했다. “비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골프에서는 악조건일수록 인내심과 경험이 있는 사람이 유리하다”고 말했다. PGA 투어 8승을 한 최경주의 마지막 꿈은 메이저 우승이다. 시간이 많이 남지는 않았다. 현대 골프에서 메이저 최고령 우승은 잭 니클라우스의 46세다. 최경주는 40세를 훌쩍 넘었다. 그러나 15년 전 그에게 꿈을 알게 해 준 키아와 아일랜드에서 그 꿈을 완성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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