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일기] '의혹 투성이' 러시아 가스전

중앙일보

입력

옛 한보그룹의 자회사로 러시아 이르쿠츠크 가스전 소유사인 루시아석유회사(RP)의 지분(7.1%)을 갖고 있던 EAGC(옛 동아시아가스㈜)가 지난해 12월 모든 RP 지분을 외국기업에 몰래 매각한 것과 관련, 또 비자금 사건이 터진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 1996년 2월 설립된 동아시아가스㈜는 정태수 전 한보그룹 총회장의 4남인 한근씨가 운영했으며, 98년 한보 비자금 사건과 연루됐던 회사다.

당시 수사 결과를 보면 96년 RP 지분 27.5%를 동아시아가스㈜ 명의로 2천5백만달러에 사들인 한보는 97년 1월 그룹 부도로 국세청과 제일은행(현재 예금보험공사로 지분 이관)에 이 회사 발행주식 전부(6백만주)를 압류당하자 RP 지분 20%를 외국 기업에 매각하면서 허위 계약서를 꾸며 3천2백70만달러를 해외로 빼돌렸다.

한보는 이 자금 중 일부(2천1백만달러)를 국내에 들여오기 위해 동아시아가스㈜를 이용했다. 알제리 자본인 것처럼 돈 세탁을 한 뒤 말레이시아에 설립한 SAGC라는 유령회사로 하여금 98년 5월 동아시아가스㈜의 증자에 참여토록 해 과반수(6백만1주)의 지분을 넘겨주고 회사 이름도 EAGC로 바꿨다. 표면상 이 회사 경영권은 외국계 자본에 넘어간 것처럼 돼 있지만 실제는 한보가 갖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올 초만 해도 직원이 남아 있던 EAGC가 두달 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한보측도 이 회사와는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EAGC 주식을 갖고 있는 국세청과 예보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됐다.

예보 관계자는 "그동안 EAGC의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 임원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과 신주발행 무효 소송을 제기해 1, 2심에서 승소하고 대법원 상고심 판결을 기다리는 중에 이 일이 터졌다" 고 말했다. 예보와 국세청은 EAGC의 지분 매각 사실을 언론 보도를 통해 뒤늦게 알았다고 말해 자산관리에 허점을 드러냈다.

이번 지분 매각대금은 적어도 2천만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데 매각대금은 누가 챙겼는지 오리무중이다. 러시아 가스전 지분을 늘리기 위해 외국에선 경쟁하는데 우리는 갖고 있던 지분도 관리하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

차진용 경제부기자 chajy@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