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살 원조 글로벌촌, 이젠 관광 필수코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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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글로벌촌인 인천 차이나타운이 제2 부흥기를 맞고 있다. 사진은 평일에도 관광객과 행인으로 붐비는 인천시 북성동의 차이나타운 거리. [인천=김도훈 기자]

지난달 28일 인천시 중구 북성동의 차이나타운. 중국 기념품 가게 아동(我東)의 주인 충룽샤(叢龍霞·40·여)는 “주말에는 외지 관광객이 많아 중국 술이나 기념품이 잘 팔린다”고 말했다. 그는 6년 전 웨이하이(威海)에서 인천으로 들어와 차이나타운에서 가게를 열고 한국인 남자와 결혼했다. 이처럼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이주해 온 중국인들은 차이나타운에서 ‘신(新)화교’로 불린다. 그러나 130여 년 역사의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신화교는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적다.

 신화교들은 음식업 대신 주로 잡화점 가게나 소규모 무역업에 많이 종사한다. 쉬쉐바오(徐學寶·54) 인천차이나타운 상가번영회 회장은 “타운 내 가게 임대료가 높아 신화교들은 인천 외곽으로 진출한다”고 말했다. 천융창(陳永昌·53) 인천화교협회장은 부친이 일제 강점기 때 산둥(山東)성에서 이주해 온 화교 2세다. 인천에서 태어나 대만에서 대학을 마치고 음식점·무역업 등에 종사하다 지금은 전동 공구 제조업을 하고 있다. 한국 여성과 결혼해 아들 둘을 둔 그는 “외국인과 그 문화를 존중해 주는 분위기가 앞으로 더 나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원조 글로벌촌이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대를 쫓아온 40여 명의 종군(從軍) 상인들에서 비롯됐다. 1884년에는 선린동 일대에 1만5000㎡ 크기의 청국 조계지도 설치됐다.

 급격히 늘어난 화교들은 인천을 중심으로 중국에서 식료·잡화품을 수입하고 조선의 사금 등을 중국에 수출하는 장사 수완을 발휘했다. 1898년 의화단의 북청사변으로 산둥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이곳 피란민들이 대거 인천으로 몰려 들었다. 산둥성 출신들은 부평 평야에서 양파·당근·토마토 등 당시 조선에서는 귀했던 채소 농사를 대규모로 짓기도 했다.

 그러나 중일전쟁과 대륙 공산화,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화교사회도 쇠퇴기를 맞는다. 화폐개혁, 토지소유 제한 등으로 경제활동이 옥죄어지자 절반 이상의 화교들이 미국·캐나다 등으로 떠나갔다.

 중국의 급부상과 함께 인천 차이나타운도 다시 부흥기를 맞았다. 인천시는 10여 년 전부터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특구 육성에 나섰다. 곳곳에 세워진 중국식 패루(牌樓), 붉은 등과 기둥, 금박 입힌 용틀임상 등이 한눈에도 차이나타운(中華街)임을 말해 준다. 한중문화관과 자장면박물관·삼국지벽화거리 등 볼거리도 많다. 21일 삼국지벽화거리에서 만난 홍콩 관광객 정완이(鄭婉儀·28·여)는 “미국 등의 차이나타운과는 색다른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저녁 무렵이면 더욱 활기를 띤다. 40여 곳의 중국식당이 몰려 있는 타운 중심가는 차와 사람으로 가득 찬다. 김임수(54·인천시 남구 주안동)씨는 “서울 등에서 회사 거래처 사람들이 오면 대개 차이나타운으로 모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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