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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자수, 선교는 뒷전… 영어 교사로 이름 날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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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호 33면

쑹자수는 아들보다 딸을 선호했다. 1942년, 성탄절 때 쑹자수의 아들 부부가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막내 즈안(子安)과 부인 우치잉(吳其英), 차남 즈량(子良)의 부인 시만잉(席曼英), 장남 즈원(子文)과 장러이(張樂怡) 부부. 맨 끝이 즈량.  [사진 김명호]

쑹자수(宋嘉樹·송가수)는 미국 감리교 교단이 중국에 파견한 최초의 중국인 선교사였다. 선교 지역은 상하이와 쑤저우 일대였다. “조국에 왔다고 생각하니 온종일 콧노래가 나왔다. 상하이 항은 보스턴보다 요란했다. 온갖 배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기적 소리를 뿜어댔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81>

미국인 담임 목사는 쑹자수를 싫어했다. “중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니다. 선교를 할 재목이 못 된다”며 검소한 중국 농민이 겨우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돈밖에 주지 않았다. 춘제(春節) 때 고향에 다녀오겠다는 청도 거절했다.

쑹자수가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아직 엄마, 아버지도 만나지 못했다. 내 처지는 창고 구석에 숨어서 탄성만 내지르는, 한 마리 쥐새끼에 불과하다. 때가 오면 이들의 오만과 권위를 날려 버리겠다. 나는 가장 불성실하고 규율을 무시하는 선교사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다.”

담임 목사의 눈은 정확했다. 쑹자수가 성경을 펴놓고 열을 올리면 엉뚱한 소리들만 해댔다. “네가 중국인이라니까 나도 한마디 하겠다. 큰 뜻을 펼칠 생각이 있다면 우선 오래 살 궁리부터 해야 한다. 30대 초반에, 그것도 사형으로 세상을 떠났다니 지혜롭지 못하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싹싹 빌거나, 뇌물을 써서라도 풀려나야 큰일을 할 수 있다.”

핀잔도 많이 받았다. “아무리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1900년 전에 태어났다는, 네가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사람의 저술이나 친필이 있으면 가져와 봐라. 문집을 남기지 않았다면 엉터리다.” 기록을 중요시 여기는 민족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쑹자수는 선교 실적이 거의 없었다. 교회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했다. 학생들 거의가 시골 소년이었다. 훗날 막내 사위 장제스(蔣介石·장개석)와 많은 일화를 남긴 후스(胡適·호적)도 쑹자수에게 처음 영어를 배웠다. “쑹자수는 중국어를 제대로 못했다. 짝달막한 키에 짧은 머리, 넓은 어깨는 전형적인 광둥사람다웠다.
생김새는 웃음을 자아내기에 족했지만 영어 하나는 일품이었다. 청나라 정부의 여권도 없이 혼자 힘으로 미국에 건너가 명문대학을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다들 기가 죽었다. 너무 외로워 보였다. 일 년이 지나자 학생수가 배로 늘어났다”는 기록을 남겼다. 쑹자수의 고독을 이해하는 친구가 해결 방법을 일러줬다. “중국에는 완벽한 여인들이 많다.”

항저우(杭州) 여인과 결혼한 쑹자수는 인쇄소를 차렸다. 처가는 중국 최고의 기독교 명문이었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와 함께 유클리드 기하학을 중국에 처음 소개한, 과학자 서광계(徐光啓)의 후예였다.

1889년 7월, 첫 딸 아이링(<972D><9F84>·애령)이 태어났다. 미국에서 귀국한 지 3년 만이었다. 4년 후 둘째 딸을 봤다. 칭링(慶齡·경령)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아들 즈원(子文·자문)이 연년생으로 태어났을 때는 시큰둥했다.

3년 후, 딸 메이링(美齡·미령)이 태어나자 “미국 명문 여자대학의 학부형이 될 수 있다”며 밤잠을 설쳤다. 장차 이 애들이 국·공 양당의 안방과 곳간 열쇠를 꿰찰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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