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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식인 지도] '거대과학' 의 기수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세기 물리학이 이룬 성과로 가장 눈부신 것 중 하나는 우주 만물의 구성 요소를 찾는 소립자 물리학이며 이 연구에 필요한 장치가 가속기이다.

발명 초기 실험실 책상에 놓일 정도로 작았던 가속기는 현재 둘레 27㎞에 이르는 초대형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이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과학 연구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소위 ''거대과학(Big Scie nce) '' 연구가 보편화했다는 것이다.

과거 개인들에 의해 수행되던 연구가 수십, 수백 명이 하나의 팀을 이루면서 거대한 조직.규모.설비가 필요한 국제 공동 연구로 발전하였다.

그 발전의 역사를 보자. 현대적 가속기의 원조는 1932년 미국의 어니스트 올랜드 로렌스(1901~58) 가 발명한 사이크로트론이다.

전력회사의 지원을 받은 로렌스는 31년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최초의 가속기 연구소를 차렸다.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LBL) 의 전신이다.

그러나 사이크로트론보다 훨씬 높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싱크로트론이 최초로 건설된 곳은 뉴욕 동쪽에 위치한 브룩헤이븐 연구소(BNL) 다.

47년 설립된 이 연구소는 컬럼비아 대학 이시도어 아이작 라비(1898~1988) 를 주축으로 10여명의 미국 학자들이 48년부터 33억 전자볼트(3.3 GeV) 급 양성자 가속기인 코스모트론을 건설하여 소립자 물리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후 60년 건설된 33 GeV급 AGS 가속기를 이용한 실험에서 무려 3개의 노벨상이 나왔다. LBL 역시 47년 이후 루이스 알바레스(1911~88) 의 주도하에 알바레스형 선형가속기와 베바락(Bevalac) 을 건설하였으며 이후 무려 9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태어났다. 60년대부터 이 연구소의 연구원을 지낸 김호길 박사(1933~94) 는 80년대 귀국하여 포항에 우리 나라 최초의 대형 연구시설인 포항방사광가속기를 건설하였다.

*** 비용.인력 엄청나게 들어

60년대 새로운 소립자들이 발견되면서 새로운 가속기와 연구소가 탄생하였다.

먼저 알바레스의 동료였던 볼프강 파노프스키는 62년 스탠퍼드 대학 구내에 스탠퍼드 선형가속기 연구소(SLAC) 를 세우고 66년 길이 3.2㎞인 세계 최대의 전자 선형가속기를 건설하였다.

한편 로렌스의 문하생인 로버트 윌슨(1914~2000) 은 66년부터 시카고 근교에 200 GeV급 양성자 가속기 건설을 시작하여 1972년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이 연구소는 시카고 대학에서 핵분열 연구로 유명한 물리학자인 엔리코 페르미(1901~54) 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페르미 국립연구소(FNAL) 가 되었다.

그러나 페르미의 연구를 이어간 곳은 이웃에 위치한 알곤 국립연구소(ANL) 로 제2차대전 당시 원자탄을 만든 맨해튼 프로젝트 중에서 재료 분야를 연구하던 곳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90년대 7GeV급 방사광가속기인 APS를 건설하게 된다. 조양래 박사(ANL) 가 이 건설의 책임자로 일했으며 그는 LBL 출신의 김호길 박사와는 대학 동기생이다.

*** 핵융합장치 4대 강국 참여

미국에서 핵융합 분야는 매터호른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라이만 스피처(1914~97) 의 지휘 하에 51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시작되었으며 나중에 프린스턴 플라즈마 물리 연구소(PPPL) 로 발전됐다. 그는 수천만 도에 이르는 뜨거운 플라즈마를 가두는 장치로 8자형으로 꼬인 코일을 둥글게 배치한 스텔러레이터를 고안하였다.

유럽의 거대과학은 본질 면에서 미국과 다를 바 없지만 프로젝트 수행 면에서는 미국과 큰 차이를 보인다. 미국은 뚜렷한 리더를 중심으로 건설이 이루어진 반면 유럽은 대부분 국가간 공동연구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누가 앞장설 수 없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럽의 거대과학은 제2차 대전으로 황폐해진 유럽의 부흥을 위하여 52년 11개국이 모여 스위스와 프랑스의 국경지역에 설립한 유럽가속기연구소(CERN) 에서 출발한다.

현재 회원국이 20개국으로 늘어난 CERN은 초기 미국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입장이었으나 유럽인다운 완벽주의로 빔 냉각 등 새로운 기술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에 힘입어 86년 카를로 루비아와 반 데 미르는 W입자를 발견한 공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한편 일본은 제2차대전 전에 유가와 히데키(1907~81) 와 도모나가 신이치로(1906~79) 등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를 배출한 바 있으나 패전과 함께 당시 보유하고 있던 사이크로트론이 미군에 의해 도쿄(東京) 만에 버려지는 비극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70년대 경제 부흥에 성공한 일본은 국가 주도하에 츠쿠바(筑波) 라는 과학도시를 건설하였다. 이곳의 핵심은 고에너지연구소(KEK) 로 니시카와가 중심이 되어 76년 12 GeV급 양성자 가속기를 완공하여 거대과학의 기반을 만들었다. 현재 수가와라 히로타카가 이끄는 KEK는 구미와 어깨를 견주는 수준에 도달하였다.

현재까지의 가속기는 국가 또는 지역 연합의 주도하에 건설할 수 있는 규모였으나 미래의 가속기는 지금까지의 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세계적인 협력이 없으면 건설할 수 없다. 이는 핵융합도 마찬가지로 ITER라는 장치를 미국.유럽.일본.러시아가 공동으로 설계를 하고 있다.

*** 다목적.학제연구 보편화

거대과학 연구에서는 다목적, 학제간, 다분야간 연구가 보편화되었으며 과거의 과학 연구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중앙집권적인 과학 연구 관리 체계가 등장하였다.

또한 여기에는 엄청난 규모의 연구비가 소요되기 때문에 연구 행위 자체가 정치.경제적인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으며 실험장치에 대한 과학자들의 의존도도 증가하게 되었다.

영화 ''콘택트'' 에서 천문학자로 분한 조디 포스터를 견우성까지 보낼 수 있는 거대한 수송장치를 전 세계가 분담하여 제작하는 장면은 앞으로의 거대과학이 어디로 갈 것이라는 것을 잘 예언해 주고 있다.

고인수 포항공대 교수.물리학

<용어설명>

▶입자가속기=전자·양성자 등 전기를 띈 입자를 광속에 가까운 고속으로 가속시키는 장치.
▶핵융합장치=바닷물 속에 풍부한 중수소 원자핵 2개를 헬륨 원자핵으로 변환시킬 때 나오는 막대한 에너지로 전기를 만드는 장치.
▶소립자물리학=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구성요소와 이들간의 상호작용에 대해 연구하는 물리학의 분야.
▶AGS=1960년 미국 BNL에 건설된 싱크로트론으로 4극 전자석이 최초로 사용된 가속기.
▶베바락=미국 LBL에 건설된 싱크로트론으로 AGS와 쌍벽을 이룸.
▶W입자=세상을 움직이는 네개의 힘,즉 중력·전기력·약한 상호작용·강한 상호작용 중 약한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입자.
▶플라즈마=초고온 하의 물질 상태로 원자가 전자와 원자핵으로 나뉘어짐.
▶ITER=국제 열핵융합로. 현재 설계 중으로 2010년 경 착공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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