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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때 "임원이 꿈" 했더니 "근데, 고졸 아냐?" 수군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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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의 ‘학력파괴’ 채용이 늘어나면서 고졸로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한계를 느끼고 조기 퇴사해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고교 졸업 직전인 지난해 말 CJ제일제당에 들어갔다 올 3월 회사를 나온 김선영(20·가명·여)씨가 서점에서 입시서적을 고르고 있다. [강정현 기자]

이혜림(19)씨는 지난해 말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부산국제외고 졸업을 앞두고 중앙대 국제물류학과 수시모집과 대우조선해양 고졸 채용에 동시 합격했지만 대학 대신 취업을 택했기 때문이다. 고졸자를 뽑아 교육시킨 뒤 경력을 쌓으면 나이가 비슷한 대졸자와 똑같은 처우를 해주는 ‘학력파괴 사무직 공채’ 1기 104명 중 하나로 합격한 것이다.

<본지>2011년 12월 14일자 E3면>

 그로부터 6개월여 뒤. 그는 대우조선이 있는 거제도가 아니라 부산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스스로 사회생활을 할 준비가 안 됐다고 느껴 입사 두 달 만에 퇴사했다”고 밝혔다. 그는 현재 중앙대에 재학 중이다.

 기업들의 ‘학력 철폐 채용’이 초반부터 흔들리고 있다. 입사자 스스로 한계를 느꼈거나 직장 안에서 차별의 벽에 부닥쳐 퇴사하는 경우가 속속 나오고 있다.

 ◆보이지 않는 차별=고교 졸업을 앞둔 지난해 하반기 CJ제일제당에 입사한 김선영(20·가명·여)씨는 올 3월 퇴사했다. “일이 힘들어 그만두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워드프로세서 등 고교 시절 따놓은 자격증이 6개가 넘어 업무엔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대학에 갔다는 친구들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수능을 준비 중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김씨는 ‘평균 4~5년 후 대졸 사원과 동일한 대우를 해준다’는 조건을 듣고 취업했다. 그러나 한 회식 자리에서 “나중에 제품 마케팅을 주관하는 부서에서도 일하고 싶다”고 말하자 선배로부터 “솔직히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힘들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는 “부서 내 고졸 출신으로 성공한 선배를 찾기 힘들었다.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고졸로서 오래 일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털어놨다. CJ제일제당 측은 “고졸 사원과 대졸 사원의 직무가 입사 초기에 차이 나는 건 당연하다. 입사 후 능력에 따라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 고졸 채용의 전제조건”이라고 설명했다.

 시민수(19)씨는 일찍 사회경험을 쌓고 돈도 버는 게 좋을 것 같아 이혜림씨와 함께 대우조선 학력파괴 공채 1기로 입사했다. 그러나 일부 직원으로부터 “너무 돈을 밝히는 게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대졸 사원이 얼마나 이 회사에 어렵게 들어왔겠나. 그분들이 우리를 낮게 보는 건 이해한다”며 “이런 시선을 동료들도 처음에는 인식하다가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고 신경 쓰지 않게 됐다”고 전했다. “출발선이 모두에게 똑같은 게 아닌가 보다”라고도 했다. 시씨는 결국 퇴사한 뒤 한 보안업체에 취업했다. 대우조선 측은 “고졸 입사자들의 건의사항을 즉각 반영해주면서 ‘인재육성그룹’을 따로 두고 취업생들의 적응을 돕고 있다”고 밝혔다. 이혜림씨는 “고졸 취업을 선택하든 대학 진학을 선택하든 개인 가치관의 차이”라며 “단지 사회가 고졸 사원을 바라보는 시선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리 꺾인 승진 희망=지난해 10월 한 대기업 관계사에 입사해 4개월간 근무했던 공업계 특성화고 출신 이모(21)씨도 올 3월 회사를 나왔다. 회식 자리에서 자기소개 때 “열심히 일해 꼭 회사 임원 자리에 오르는 게 꿈”이라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한구석에서 “근데, 고졸 아냐?”란 소리를 듣고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한다. 그는 “이런 얘기까지 들을 줄은 몰랐다”며 한숨을 쉬었다.

퇴사 후 그 역시 난생처음으로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 중이다. 그는 “대학 진학은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던 가치관에 입사 후 처음으로 붕괴가 왔다. 내가 진로 선택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이 괴롭다. 요즘은 잠을 한두 시간밖에 못 자고 집중력도 떨어져 정신과에서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 먹는다”고 토로했다.

채승기·조혜경 기자
조홍석 인턴기자(연세대 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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