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대 첫 한인 프로복서 '철권' 서정권 베일 벗었다

미주중앙

입력

서정권씨(왼쪽)는 LA 데뷔 직후 매니저를 일본계에서 유대계로 바꾸었다. 그는 주류언론에 자신을 `한국사람 서정권`으로 써달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위쪽 사진은 아버지 서정권씨의 생전 활약상을 설명하는 둘째아들 서해석(72)씨.

꼭 80년전 오늘. 1932년 7월 23일 밤 LA한인타운은 한껏 들떴다.

일주일 뒤 열릴 LA올림픽 때문에 시전체가 축제 분위기였기도 했지만 한인들이 흥분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날 밤 한인들의 발걸음은 리글리필드(Wrigley Field.현재 케드런 정신건강센터 부지)로 향했다. 마이너리그 야구팀 LA에인절스의 홈구장이다. 사우스LA의 한인타운과 불과 7블럭 떨어져 걸어가기도 편했다.

야구장에서는 전미권투협회(NBA.현재 세계권투협회의 전신) 밴텀급 시합이 열렸다. 2만2000석이 초만원을 이뤘다.

야구장 한 가운데 특설 링에 드디어 도전자가 올라섰다.

그는 만 열아홉살 무명의 작은 동양인이었다. 5피트 2인치(158cm) 단신에 몸무게도 47kg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작은 사내에게 관중들은 열광했다. 그는 '파란의 주인공'이었다. 일본에서 미국 프로에 진출한 지 2개월. 지난 5차례 프로경기서 4승 1무를 기록했다. 상대는 모두 강자였다. 특히 3주전 오클랜드에서 맞붙은 '리틀 판초'는 세계 밴텀급 1위였다. 리틀 판초와 혈투끝에 그가 무승부를 거두자 미국 복싱계는 열광했다.

장내 아나운서는 그를 일본식 이름인 '조 테이켄(Joe Teiken)'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그가 등장하자 관중석의 한인들은 한국 이름을 외쳤다.

"서.정.권 서.정.권."

한인들에겐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억압받던 한민족의 울분을 링 위에서 풀어준 영웅이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일본 복싱계에 입문 3년간 27전 전승으로 내노라하는 일본 복서들을 무너트린 '애국의 돌주먹'이었다.

하지만 이날 경기는 그의 열세가 예상됐다. 상대는 밴텀급 세계 4위인 필리핀계 프리스코였다.

"땡!"

공이 울렸다. 경기는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게했다. 그는 3회까지 프리스코를 거칠게 압박했다. 그러나 4회 2차례나 다운을 당했다.

하지만 쓰러졌다 일어나고 또 쓰러져도 일어났다. 남은 6라운드에서 그의 돌주먹은 위력을 발휘했다. 비록 상대를 다운 시키진 못했지만 심판들은 판정승으로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영화 같은 역전승에 한인들은 마치 고국의 독립이라도 본 듯 감격했다.

훗날 서정권은 이날 경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가장 많은 동포들이 사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잘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가장 힘겨운 일전이었다. 이겼다는 것을 알았을 때 까닭없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서정권은 이날 경기 이후 미국에서 활동한 3년간 돌풍을 이어갔다. 정작 한인들에게는 낯설지만 미국 프로복서 백과사전인 'BoxRec'에는 그의 이름이 아직도 기록되어 있다.

BoxRec은 그를 "정통파 선수로 최초의 코리안 프로복서다. 비록 승률이 훌륭한 편은 아니지만 강자들과 당당히 맞섰다. 충분히 경쟁력있는 선수"라고 평가했다.

할리우드는 그의 이름도 다시 찾아주었다.

LA 데뷔 직후 그는 일본인 매니저와 결별하고 유대계 매니저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난 조 테이켄이 아니라 서정권"이라고 언론에 소개해 줄 것을 부탁했다.

1933년 1월 13일 할리우드 리저널 스태디움에서 열린 유진 화트와 일전을 승리로 끝낸 뒤 LA타임스는 그의 바람대로 국적을 일본이 아닌 한국으로 이름을 서정권이라고 본명으로 기록했다. 할리우드에서 잃었던 국적과 이름을 되찾은 셈이다.

LA의 역전승 2년 뒤인 1934년 11월 복서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 특설 링도 밟았다. 동양인 최초였다. '인디언 퀸타나' 리처드 리브랜디 찰리 젤레타스 쟁쟁한 상대 3명과 맞서 2승 1패를 기록했다.

미국에서 권투선수로서 짧지만 선굵은 족적을 남긴 그는 전남 순천 4000섬 부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부가 싫었던 그는 일본으로 갔다. 동경 유학중인 큰 형님께 의탁할 요량으로 할아버지 돈 궤에서 300원을 훔쳐 가출해 일본에서 권투를 배웠다.

불과 3개월만에 링에 올랐고 1년도 안된 이듬해 전일본 아마추어선수권 대회 등 3개 대회에서 연달아 우승했다.

적수가 없어 프로로 전향했다. 1931년 4월 26일 가시와무라 고로와 첫 대전을 시작으로 27번 경기서 전승을 거뒀다. 18살에 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 전설이 됐고 미국에서도 최초라는 역사가 됐다.

미국에서 한창 물이 오른 1935년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급히 귀국했다. 알고보니 아들을 결혼시키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결혼 후 가정을 가졌지만 그토록 꿈꾸던 미국 재도전 길에는 오르지 못했다.

중년과 말년은 어두웠다. 권투밖에 몰랐던 터라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았다.

그는 챔피언은 아니다. 1973년 한 지방일간지에 남긴 회고록에서 서정권은 "번듯한 도장 하나 갖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하지만 80년전 LA한인들에게 그는 이미 챔피언이었다. 이역만리 동포들에게 대한민국이라는 자부심이라는 벨트를 안긴.

그는 회고록 마지막편에서 이렇게 썼다.

"내 나이 63세. 내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세상 또한 점차 나를 잊어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다. 하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꿈을 향해 살아갈 것이다."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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