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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김경원 전 주미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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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985년 김경원 주미대사(오른쪽)가 백악관에서 레이건 미국 대통령(왼쪽)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뒤 환담을 나누는 모습. [중앙포토]
김경원

주미대사와 대통령 비서실장, 사회과학원장을 역임한 김경원 전 서울국제포럼 회장이 22일 오전 10시 지병으로 별세했다. 76세.

 1936년 평안남도 진남포 태생인 고인은 한국전쟁 전 모친·동생과 함께 월남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고인은 평생 한반도의 외교안보를 연구하며 정책대안 제시에 헌신했다.

 고인은 서울고를 졸업하고 서울법대에 재학 중 미국 유학길에 올라 63년 하버드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헨리 키신저와 스탠리 호프만이 스승이었다. 특히 키신저의 영향을 많이 받아 국제정치에서 현실주의적 신념을 견지했다. 이념이나 노선보다는 국익 우선의 냉엄한 국제현실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지녔다고 빈소(서울아산병원)를 찾은 지인들은 입을 모았다. 이홍구 전 총리는 “고인은 키신저 박사를 벤치마킹하며 성장했다”며 “키신저도 방한할 때마다 고인의 안부를 물으면서 ‘가장 탁월한 학생 중 한 명이었다’고 기억했다”고 말했다.

 고인은 현실주의자(realist)로서 실용주의 외교에 크게 기여했다고 이 전 총리는 소개했다. 이 전 총리는 “당대 가장 뛰어난 국제정치학자로서 현실에 밝았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시절 우리 현실 정치에 빼어난 아이디어를 제공한 분”이라고 평가했다.

 71년 귀국해 고려대 교수로 일하던 고인은 75년 박정희 대통령의 국제정치담당 특보로 발탁된 데 이어 80년 9월엔 전두환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기용됐다. 고인의 사촌 매제인 임성준 전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은 “박정희 정권 시절 미국이 한국 정부의 독재와 인권을 비판할 때 고인은 한국적 현실을 미국 측에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며 “전두환 정권은 미국에서 존경받던 고인을 비서실장으로 등용해 미국이 안심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82년 주유엔 대사에 이어 85~88년 주미대사를 지냈다. 대사 시절엔 흠 잡을 데 없는 영어실력과 ‘조용한 외교’로 주목을 받았다. 임 전 이사장은 “고인은 83년 KAL기 격추와 아웅산 테러 당시 주유엔대사로 유엔 안보리에서 우리 정부의 입장을 역설했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뛰어난 문장가로도 유명하다. 주미대사 시절 고인을 보좌했던 길정우 의원(새누리당)은 “중요한 연설문을 직접 쓸 때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집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시가 2개를 피우며 두문불출했다”며 “그렇게 작성한 연설문이 워낙 논리정연한 명문인데다 통찰력을 담고 있어 주요국에 나간 우리 대사들이 빨리 구해보려고 안달할 정도로 베스트셀러였다”고 말했다.

 고인은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93년부터 12년간 한국바그너협회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김병국 국립외교원 원장은 “고인은 문·사·철에 두루 밝았고 넓고 깊게 진리를 탐구한 클래식한 지식인이었다”며 “미적 세계에도 흠뻑 젖어 있던 분”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89년 고 김준엽 전 고대 총장과 함께 ‘계간 사상’을 창간해 한국 사회에 새로운 담론을 적극 소개했다. 언론에도 칼럼을 연재했다. 10년 전부터 파킨슨병을 앓으면서도 늘 여유와 미소를 잃지 않았다고 지인들은 회고했다. 이날 빈소에는 이홍구 전 총리, 한승주·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 성김 주한 미국대사 등 각계 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한승주 전 장관은 “국제정치 분야에서 세계적인 존경을 받아온 고인을 알고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특전이었다”며 애통해했다. 또 김병국 원장은 “진보든 보수정권 때든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세계를 한국에 끌어들여 대한민국의 세계화에 기여하셨다”고 말했다.

 유족은 부인 박애경(75)씨와 2남. 장남 헌수씨는 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 아시아 본부장이고, 차남 유수씨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코리아 디렉터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 발인은 25일 오전 8시30분, 장지는 충남 천안공원묘원. 02-3010-2631. 장세정 기자

이승권 인턴기자(조지워싱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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