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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세 서예가, 매일 약주하며 명작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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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소지 선생이 친구와 술을 마신 뒤 즉석에서 쓴 이태백의 ‘산중대작(山中對酌)’. 소지 선생이 행서로 쓴 글씨 중대표작으로 꼽힌다. 작품 속의 취(醉?오른쪽에서 셋째 줄 맨 윗 글씨)자가 소지 선생 글씨의 백미다. 다음은 ‘산중대작’ 원문. 兩人對酌山花開 一杯一杯復一杯(양인대작산화개 일배일배부일배: 둘이 마주 앉아 술잔 들다 보니 산엔 꽃이 활짝 피었구나. 한 잔 한 잔, 또 한 잔.) 我醉欲眠君且去 明朝有意抱琴來(아취욕면군차거 명조유의포금래: 내가 취하여 졸리니 그대는 가시게. 내일 아침 또 한 잔 생각나거든 거문고 안고 오시게나.)

찰랑거리는 캘리포니아 햇살이 가득한 맹하(孟夏). 방이 하나 딸린 작은 아파트다. 모든 것이 현란한 색깔로 반짝이는 밖의 세상과 달리 이곳은 흑백의 세계다. 지필묵과 여기저기 쌓여 있는 책들에는 색이 없다. 현관문 위쪽에는 ‘臨池軒(임지헌)’이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임지헌은 소지 강창원 선생이 미국에 오기 전 운영하던 인사동 서실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많은 제자와 서예 애호가들을 키웠다.

소지 강창원 선생은 95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곧은 자세로 글씨를 써내려갔다. “그림은 몇 번을 덧칠할 수 있지만 글씨는 단 한 번에 써내려가야 한다”는 그의 붓놀림엔 망설임이 없었다. 미국 LA 자택에서 ‘功?無量(공덕무량)’을 쓰고 있는 소지 선생. [사진 LA중앙일보]

●‘임지헌’은 무슨 뜻인가요.

 “글씨 쓰는 다락이란 뜻이지. 임지란 한나라 시대 장지라는 서예가의 일화에서 나왔어. 臨池學書(연못가 집에서 글씨를 배우며), 池水盡墨(연못의 물을 다 먹물 색으로 만드네). 글씨 연습을 하느라 검게 물든 옷과 베, 그리고 붓을 자주 빨다 보니 연못 물이 모두 까맣게 물들었다는 이야기지.”

●왜 현관 바깥쪽에 걸어놓지 안쪽에 걸었습니까.

 “그쪽(바깥)은 그냥 세상이고, 이쪽(집안)은 글씨 세상이니까.”

 ‘색, 계’. 임지헌 현판 하나는 물질과 욕망이 난무하는 색(色)의 세상과 나를 지키고 경계하는 계(戒)의 세상을 갈라놓고 있었다. 그의 공간은 깨끗하고 곧은 습관을 익히려는 결의의 장이었다. 문지방 밖과 안은 그렇게 달랐다. 소지 선생은 ‘색의 세계’인 미국 제2의 도시 로스앤젤레스(LA) 한복판에서 ‘계의 세계’ 중심에 군림하는 듯했다.

단정한 삶처럼 글씨도 반듯

 소지 선생은 해서(楷書)의 달인이다. 바로 쓰기다. 단정한 삶처럼 글씨도 그렇다. 그는 당나라 때의 달필 안진경의 글씨를 좋아한다. 글씨가 빼빼 마르지 않고 근육과 살이 붙어 풍만하단다. “바른 짜임새에 흐르는 멋이 좋아. 생명감이 넘치고 강직한 정신까지 들어있어. 안진경의 글을 제일 많이 썼지.”

●이 분야에서 대가로 통하시는데.

 “대가는 무슨…. 정상을 이룬 그의 글을 후세들이 얼마나 많이 따라 썼겠나. 하지만 그 대가를 넘지는 못해. 나도 평생을 연습했지만 한 80% 정도만 좇아갔지. 그래도 한창일 때는 안진경의 글씨만큼은 한국에서 내가 최고였어, 허허.”

소지 선생 필생의 대표작 금강경 해서.

●‘소지(昭志)’라는 호의 뜻은 뭔가요.

 “밝게 살자는 뜻이지. 다른 뜻도 있어. 원래 뜻인 소지(昭志)가 있고 소지(燒紙), 즉 글씨 쓰고 연습한 종이를 많이 태우는 사람이란 뜻도 있지. 또한 소지(掃地), 비로 땅의 쓰레기를 쓸 듯 글을 쓸어내는 사람이란 뜻도 담겨 있고.”

 소지 선생의 대표작은 ‘광개토대왕비’와 ‘금강경’이다. 특유의 해서로 가로 384㎝, 세로 210㎝인 광개토왕비의 전문 1775자를 한국 서예가 중 최초로 썼다. 또한 금강경은 전문 5000자가 넘는 긴 내용의 대승경전이다. 가로 70㎝, 세로 137㎝의 전지 153장에 하나의 작품으로 썼다. 이런 대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른 글씨로 쓴다는 건 단단한 체력과 정신력, 필력과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는 해서를 통해 구축된 필력과 기법을 바탕으로 물 흐르는 듯한 행서(行書)도 매우 잘 썼다. 따로 연습했다기보다는 해서를 많이 쓰다 보니 저절로 특유의 기법이 밴 생동감 넘치는 글씨가 됐단다. 행서로 쓴 ‘반야심경’은 절반으로 접은 화선지의 한 열에 네 자씩 쓴 작품으로 길이가 10m가 넘는다. 그는 또한 다양한 크기의 글씨를 동시에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부채꼴 모양의 ‘백낙천지상편외(白樂天池上篇外)’를 보면 크고 작은 세 가지 크기의 글씨를 단숨에 써내려 간 게 그의 필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의사 집안에서 글을 쓴 이방인

10m 넘는 종이에 큰 글씨로 쓴 반야심경 행서.

 선생은 ‘이방인’이다. 1918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강창흠은 고종과 순종 두 황제를 모셨던 전의(典醫·정3품)였다. 아버지 강태영은 일본에서 유학한 뒤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치과의사를 했다.

●선생님도 의사를 하지 그러셨습니까.

 “난 그런 재주가 없어.”(웃음)

●글은 언제, 왜 쓰기 시작한 겁니까.

 “열다섯 살 때쯤 여름방학 때 석 달간 정말 열심히 썼어. 학교에 가면 다른 애들(중국인)은 다들 잘 쓰는데 내가 제일 못 썼거든. 방학 끝나고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칭찬해 주시더라고. 우쭐했지. 그게 시작이었어. 매일 책 읽고 글씨 쓰고 그랬지.”

●서예는 어디에서 배우셨습니까.

 “선친의 병원과 응접실에는 늘 당대의 유명인들이 환자나 지인으로 찾아 왔어. 그중에는 중국 군벌, 대학 교수, 사상가, 서예가, 화가, 문인 등 상류층 인사들도 적잖았지. 그들이 선물로 기증한 많은 작품이 내 서예 교본이었어. 그 모두가 스승이었던 셈이지. 특별히 따로 배웠다기보다 화랑 같은 집안 분위기랄까. 또 그 당시 베이징 거리의 모든 건물에 으레 금분을 입힌 목각 현판들이 경쟁하듯 현란하게 붙어 있었는데, 명필들이 쓴 글씨를 감상하며 걸어다니는 것 자체가 귀중한 배움이었지.”

 그는 해방 후 한국에 돌아왔다. 하지만 서예가의 등용문인 국전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서예란 선비가 학문과 더불어 스스로 즐기며 수양하는 예술이지, 이를 이용해서 ‘국전 권력’을 잡거나 이름을 날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특히 중국에서 정통으로 글씨를 배운 그로서는 누군가에게 심사를 받는 것 자체가 싫었다고 했다. 성균관대 등에서 글씨를 가르쳤고, 생계로 국제방송 아나운서(중국어)도 하고 보험회사와 김포세관 등에서도 일했다. 직장 후배가 여초 김응현 선생과 휘문고 동창이어서 그를 만나 서예를 논하기도 했다. 여초의 형인 일중 김충현 선생과도 교류했다.

●친구였습니까, 라이벌이었습니까.

 “그렇게 각을 세우는 사이는 아니고, 서예 동지였지. 나이는 좀 아래였지만 훌륭한 사람들이었어.”

 당시 한국 서예계는 일중과 여초, 그리고 검여 유희강 선생이 주류의 대표주자였다. 소지 선생은 재야에서 두각을 보였다.

●어떻게 미국에 오시게 됐나요.

 “77년 둘째 아들을 따라 미국에 왔어. 서예 불모지인 LA에서 임지헌을 열어 후학도 키우고. 전시회도 여러 번 열었지.”

 2대째 이어져 오던 의사의 ‘붉은 피’를 소지 선생은 서예가의 ‘검은 먹’으로 바꿨다. 80년 동안이나 글을 썼는데 정말 피가 검은색이 된 건 아니냐고 물었다. 뜬금없는 ‘농(濃)’에 선생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담(淡)’의 대답. 그는 농담의 아티스트였다.

술은 음식 … 끊을 수 없다

 소지 선생은 술을 즐긴다. 매일 반주로 소주 반 병에서 한 병, 아니면 보드카 세 잔 정도를 기울인다. 이제 단주하셔야 될 때 아니냐고 묻자 “술은 음식이니까 끊을 수 없다”고 했다. 글을 쓸 때 술이 도움이 되느냐고 되묻자 “쓸 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기분이 좋아져서 쓰게 된다”고도 했다. 세상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술을 마시지만 선생은 술 자체가 목적이었다.

 그의 제자로 춘천에서 북카페를 운영하는 김종헌 전 남영비비안 사장에 따르면 선생이 약주 후 흥취가 날 때 쓴 글씨 중에 빼어난 작품이 많다고 한다. 특히 이태백의 시 ‘산중대작(山中對酌)’은 부드럽고 힘찬 붓놀림과 획의 강약, 선의 다양한 굵기 등으로 불후의 명작이라고 했다. 붓은 술에 취했고, 흥이 난 붓이 종이 위에서 흐느적거리며 예술을 만들었다. 김 전 사장은 선생의 호인 ‘소지’에 항상 ‘도인’을 붙여 ‘소지도인’으로 칭한다. 은둔자의 유유자적, 그리고 술 향취 속 일필휘지….

●새겨들을 만한 좋은 말씀 하나 해주십시오.

 “내 주제가 그런 사람이나 되나. (잠시 말이 없다가) 그저 진실되게 공부하고 일하면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높아지고 일도 잘 풀려. 굳이 남의 잘못된 점을 찾아볼 시간이 어디 있겠어. 공자님 말씀이 향기가 나는 것이지, 공자님 똥도 구리긴 마찬가지야. 공자님 말씀과 같이 좋은 것만 배우고 새겨 듣게. 똥은 피해 가면 되지.”

●사모님은 어디 계십니까.

 “양로병원에 있어.”

●어디 아프신 데라도 있나요.

 “아니, 그냥 늙어서 그렇지(부인 박정숙씨는 91세다). 이틀에 한 번꼴로 찾아가.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나와 동행했지. 좋은 사람이야. 근데 나보다 먼저 누워 있으니….”

  책꽂이에는 각종 글씨를 모은 책이 가득하다. 소파에도 커다란 손 돋보기 아래 방금 읽던 글씨 책이 놓여 있었다.

●선생님, 돋보기가 큽니다.

 “나이 들면 노안이 오잖아. 자질구레한 군더더기는 보지 말라는 자연의 섭리야.”

●그런데 선생님은 왜 돋보기로 자세히 보시려 합니까.

 “자세히 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글씨의 ‘힘’을 느끼려는 거지.”

 매일 꾸준히 몸관리를 해와서인지 95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세가 꼿꼿하다. 글 하나 써주십사 부탁하자 그 자리에서 두 점을 직접 써줬다. ‘言論先聲(언론선성)’과 ‘功<5FB3>無量(공덕무량)’. 중간에 붓이 갈라져 획이 살짝 어긋나자 “붓도 나이를 먹나”라며 허허 웃은 뒤 또 한번 썼다. 백발 머리에 흰 종이와 검은 글씨, 빨간 낙관이 어우러지며 엄숙한 시간이 흘렀다.

 글씨를 마치고 소지 선생이 물었다. “왜 서화(書畵)라고 하는지 아는가.” 그는 자답했다. “그림은 몇 번을 덧칠할 수 있지만 글씨는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완성해야 해. 모든 게 머릿속에 미리 계획돼 있어야 글을 쓸 수 있지. 그림보다 수준이 높기 때문에 서(書)가 화(畵)보다 먼저 오는 거야.” 옅은 미소 속에 자부심이 어려 있다.

●글씨란 대체 무엇입니까.

 “뭐 있나. 영자팔법(永字八法·글을 쓸 때 기본이 되는 서예법)과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 등 5가지 필체지.”

 80년간 글씨를 쓰면서 생긴 그만의 철학이 궁금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역시 영자팔법과 필체”라고 담담히 답했다. 현학적인 선답을 기대한 게 아마추어였다. 대가의 철학은 기본과 원칙이었다. 소지 선생은 흑과 백의 가장 단순한 색 속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여백의 흰색처럼 모든 색을 품고 있었다.

LA중앙일보 김석하 기자

고령에도 자세 꼿꼿 소지 건강 비법은
팔심 키우려 아령 … 대나무 구슬로 등 마사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서예에서 육체적 건강은 무척 중요하다. 소지 선생은 “뼈와 근육이 튼튼히 받쳐줘야 정신 세계도 탄탄한 법이야”라고 말한다. 그는 장수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 매일 체력을 단련한다.

 운동기구는 간단한 도구 세 가지다. 첫째는 아령. “팔의 근육을 단련해야 해. 팔목의 힘도 중요하지. 이 아령을 한 번 잡으면 백 번 이상은 할 거야. 틈나면 수시로 해.” 팔을 접어 올리는 동작과 팔목을 회전하는 동작을 병행한다.

 팔 운동이 끝나면 곧바로 등 근육을 단련한다. “등과 허리가 곧추서야 글을 제대로 쓰는 법이야.” 이용하는 기구는 탁구공만 한 대나무 구슬이 촘촘히 이어진 1m가량 되는 줄이다. 이걸로 등과 허리 근육을 마사지한다. 95세라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꼿꼿한 자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자세가 조금은 앞으로 굽게 마련인데 그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눈앞에서 이뤄지는 운동을 하는데, 안 보이는 뒤쪽 근육에 신경을 써야 해. 그래야 균형이 맞는 법이지.” 앞만 보는 세태에 대한 따끔한 충고로 들렸다.

 “마지막으로 발바닥을 마사지해.” 그러면서 큰 대나무 원통을 반으로 쪼갠 걸 보여줬다. “이걸 이렇게 바닥에 놓고 위로 올라가 쓱쓱 문지르는 거지. 시원하고 정신이 맑아져.”

 연계 동작으로 운동을 하며 환한 미소를 짓는 선생을 보노라니 발끝에서부터 허리·등으로 타고 올라 손끝으로 이어지는 대가의 기(氣)가 절로 느껴졌다. “몸이 건강하다고 다는 아니지. 술을 마시고, (온갖 제약으로부터) ‘풀린 정신’을 갖는 것도 때론 중요해. 그럼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잖아.”(웃음)

 침실 안쪽 벽에 십자가가 언뜻 보였다. 종교가 있으십니까. “천주교 신자야. 딸이 수녀원장으로 있거든. 참, 기도도 빼놓지 않는 운동이지, 허허.” 소지 선생의 단출한 일과 속에는 행복 플러스가 있었다. 바로 ‘영혼과 육신’의 균형 잡힌 탄탄함이다.

LA중앙일보 김석하 기자

제자 김종헌씨가 말하는 나의 스승 소지
중국 고문?한학에 밝아 … 전통파고 정통파죠

“전통파이자 정통파죠.”

 제자는 스승을 그렇게 평했다. 김종헌(65·사진) 전 남영비비안 사장이 소지 강창원 선생을 찾아간 것도 그가 전통 서예인이었기 때문이란다. 김 전 사장은 중학생이던 1960년 서예에 입문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선생이던 원곡(原谷) 김기승 선생에게 서예를 배웠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서예가의 등용문인 국전에 치우친 교육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란다. 순수하게 글씨를 배우고 싶던 그는 대학생이 돼서 소지 선생을 찾았고, 그때서야 “진짜를 만났다”는 깨달음이 왔다고 한다.

 1960년대 한학과 동양화, 서예와 미술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동은 유일한 놀이터였다. 그중에서도 소지 선생의 서실인 인사동 임지헌은 검여(劍如) 유희강 선생의 서실과 함께 손에 꼽는 아지트였다. 술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소지 선생의 소탈한 성격 덕분이다. 당시에 “종로 쪽에서 인사동 가는 사람은 소지도인과 점심을 먹고 놀다가 해 떨어지면 검여와 술을 마시고, 안국동에서 인사동으로 가는 사람은 검여와 점심을 먹고 소지도인과 저녁에 술을 마신다”는 농담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정갈하고 힘찬 필체는 붓끝에서 나온다. 그와 함께 세월을 견딘 붓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서예를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송천(松泉) 정하건(77) 선생 역시 소지 선생의 팬이다. 추사 김정희의 진품부터 중국의 명필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의 글씨까지 수집하는 그가 현존하는 작가의 서예 작품은 유독 소지 선생의 것만 찾는다. ‘진짜’ 글씨라는 이유에서다.

 이에 대해 김 전 사장은 “중국의 고문과 현대의 백화(구어체)를 두루 섭렵하고 문장을 직접 지을 수 있는 서예가는 거의 없다”며 “소지 선생은 한학을 겸비한 전통서예의 마지막 주자”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 한문 작품을 하는 서예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수준인데 선생은 모든 글씨가 일필휘지”라며 “붓을 잡고 첫 획을 내려쓰는 순간 이미 글씨를 완성하는 작가”라고 덧붙였다.

 현재 김 전 사장이 갖고 있는 소지 선생의 작품은 2000여 점. 춘천에서 북카페와 소지 선생의 서예기념관을 함께 운영하는 그는 5년 후 있을 소지 선생의 백수전을 차근차근 준비 중이다.

채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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