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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대한민국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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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

낸시 펠로시. 미국 민주당의 하원 원내대표다. 미국의 첫 여성 하원의장이기도 했던 그가 종종 인용하는 일화다.

 어느 날 동료 의원들과 토론했다. 한 남자 동료가 출산이란 주제를 꺼내자 모든 남자들이 앞다퉈 ‘출산 경험’을 얘기했다. 한 명-남자다-이 말했다. “세상에, 첫째가 태어났을 때 내가 녹색 수술 가운을 입었는데도 나를 방에 들여보내주지 않더라고.”

 그 자리엔 펠로시 말고도 두 명의 여자가 더 있었다. 모두 합해 11차례의 출산 경험이 있었다. 남자들은 물론 단 한 번도 없었다. 여자들은 웃지 않기 위해 서로 팔꿈치를 찔렀다. 그러곤 생각했다. ‘음 이제 분명히 우리에게 물어보겠지’.

 남자들은 끝내 질문하지 않았다. 펠로시는 “오래전 나는 내가 남자들의 태도를 고치기 위해 의회에 온 게 아니란 결론을 내렸다. 국가 정책을 바꾸러 이곳에 왔다”고 넘겼다. 그래도 하원의장이 됐을 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동료 의원들에게 많은 것을 묻고 상의하겠지만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다. 남자 의원들에게 출산에 대해선 묻지 않겠다.”

 남자들, 이처럼 엉뚱한 데가 있다. 대한민국 남자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거다. 요즘은 보름달 정기가 예전만 못해서인지 실존적 열등감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태아 시절엔 아득히 들려오는 “아들이 아니었으면…”이란 웅성거림에 존재론적 부인을 경험한다. 커선 “남학생들의 태도나 경향을 볼 때 교육은 거의 음모에 가깝다”(심리학자 다이앤 맥기네스)는 연민을 받는다. 장성해서도 나아질 건 없다. 아내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가, 혹 외출하는 아내에게 행선지를 물었다가 간 질환을 의심받는 남자 여럿이다. ‘무식’이라고 불린다고 화낼 수도 없다. 무식(無食·집에서 하루 한 끼도 안 먹는다)은 상찬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불안 말도 못 한다. 오죽하면 “한국 사회의 문제는 불안한 한국 남자들의 문제다. 존재 확인이 안 되기 때문”(김정운의 『남자의 물건』)이란 분석까지 나오겠는가.

 이런데도 ‘대한민국 남자’를 자처한 이가 있으니 용기가 가상하다. 더욱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내놓은 슬로건(대통령 이미지·Presidential Identity)이란다. 드문 일이다. 1979년 미국 보스턴 시장 선거 때에 ‘남자’가 들어간 슬로건이 등장한 적이 있긴 하다. ‘도시와 사랑에 빠진 고독한 남자’였다. 43년 전 ‘까도남’인 거다. 일은 잘하는데 인기는 없었던 현직 시장이 내건 구호였다. 힘줌말은 그러나 남자에 있지 않았다. 경쟁자 역시 남자였기 때문이다.

 이번엔 남자에 방점이 찍혔다. PI를 만든 전문가-그도 남자다-가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진정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강조한 데서 드러나듯 말이다. 전문가는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남자가 진정한 남자인지 그려 보이진 않았다. 다만 그 대통령 후보-역시 남자다-가 근래 유도복을 입고 누군가를 메치거나 특전사 군복을 입은 채 달리기 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걸로 봐선 병역을 ‘제대로’ 필한, 힘센, 그리고 성별이 남자인 사람을 의도한 듯하다.

 사실 그 후보가 특전사 출신인 건 75년 유신 반대 시위로 강제징집을 당했고 박정희 정부가 그 무렵 “데모하다 군에 끌려온 학생들을 고생시키자”는 쪽으로 방침을 바꾼 덕이다. 박 전 대통령의 공이 큰 거다. 슬로건 덕에 공로자의 딸과 경쟁하는 인연의 오묘함도 엿볼 수 있게 됐다.

 슬로건의 묘미는 또 있다. 그간 한국 정치에서 디폴트는 남자였다. 남자는 그저 국무총리고 법무장관이고 국회의원이어도 여자는 여성 국무총리, 여성 법무장관, 여성 의원으로 불렸다. ‘대한민국 남자’가 비로소 이 설정을 깬 거다. 남자 대통령을 깔고 있는 거니까 말이다. “기저에 여성 대통령은 안 된다는 마초성이 깔렸다”고, 또 “대통령으로서 앞세울 게 병역과 힘이냐”고 타박만 할 일이 아니란 얘기다.

 하나 한 가지는 못 박아야겠다. PI 발표 때 “노무현의 그림자.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이 한마디를 끝까지 안고 갈 것이다. 남자는 그래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할 일이라면 남녀 구분할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