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후진국에 도시건설 서비스 통째로 수출해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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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호 08면

폴 로머 교수는 기술 혁신 시대에 맞는 경제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기술을 “일을 하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정의한다. [사진 마크 오스토 Mark Ostow]

국제기구들의 분류에 따르면 한국은 선진국이다. 부담스러운 타이틀이다. ‘준(準)선진국’ 정도의 호칭이 마음을 더 편하게 만들지 모른다. 한국은 복지를 업그레이드해야 하며 이를 위해 성장이 필요하다. 복지와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둘 다 놓칠 수도 있다. 많은 국민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는 것을 체감하지 못하지만 한국이 개발도상국들을 위해 더 큰일을 해야 한다는 압력도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김환영의 해외 석학 인터뷰 폴 로머 뉴욕대 경제학 교수

피터 드러커가 지목한 노벨 경제학상 1순위
경제 성장, 발전 전문가인 폴 로머 교수는 한국이 직면한 이런 도전에 도움말을 줄 수 있는 학자다. 뉴욕대(NYU) 스턴 비즈니스 스쿨의 경제학 교수인 그에게는 경제학이 ‘로머 전’과 ‘로머 후’로 나뉜다는 극찬의 평가도 있다. 신성장이론(new-growth theory)으로 경제학에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로머 교수는 일찌감치 경제학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폴 크루그먼 교수는 그를 ‘1980년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로 손꼽았다. 97년, 시사주간지 타임은 로머 교수를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25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경영 구루 피터 드러커(1909~2005)는 로머 교수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노벨 경제학상 1순위 후보인 그를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가 2010년 ‘세계 100대 사상가’ 중 54위로 선정했다. 선정 이유는 수천 개의 홍콩을 만들어 개도국의 경제 성장을 도모하자는 차터 시티(charter cities) 구상이었다. 그는 실제로 온두라스에서 차터 시티 건설의 마스터마인드다. 로머 교수를 9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다음은 인터뷰 요지.

-한국의 경제발전을 평가한다면.
“지난 40~50년 동안 한국이 이룩한 경제 성장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한국의 이례적인 성공이 가까운 미래에도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성장을 이루기 위한 도전은 소득 수준과 경제발전 단계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매우 성공적이라는 종합 평가를 내릴 수 있다.”

-한국은 가난한 나라들을 위해 더 많은 공헌을 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 모델을 수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은 저개발국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경제발전과 국제무역은 닮은꼴이다. 개발도상국을 포함, 모든 당사자가 보다 많은 교역, 상호작용으로 잠재적으로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다. 자선(charity)으로는 안 된다. 개발도상국들이 직면한 도전의 규모로 볼 때 자선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통상적인 개발원조 방식으로는 안 된다. 한국은 후진국 발전을 가속화하고 한국 기업과 경제에도 이득이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런 길이 있다. 현재 후진국에서 가장 큰 기회는 신속하고 효과적인 도시화에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인지하고 있다. 이번 세기에 도시화는 후진국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이다. 후진국 도시화는 전 세계에 이득이다.
신도시 개발 경험이 풍부한 한국은 경쟁력이 있다. 한국의 건설회사, 설계회사, 부동산개발 회사, 도시화와 연관된 정부 기관들이 도시화를 바라는 나라들에 전문지식을 제공하면 양측 모두에 이득이 될 것이다. 도시 수출이라는 서비스 산업 수출은 한국에 잠재적으로 매우 큰 이득을 안겨 줄 수 있다. 한국은 후진국을 위해 두 가지 역할을 할 수 있다. 효과적인 정부 서비스와 제도를 전수하는 게 하나다. 두 번째 역할은 한국 정부와 기업이 후진국 발전과 산업화를 위해 구체적인 투자에 나서는 것이다.”

-수천 개의 차터 시티를 만들고 수천 개의 홍콩을 만들자는 구상은 미국이나 한국의 경제 성장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국내 차원에서 보면 선진국보다는 후진국에 더 맞다. 후진국에는 도시의 수가 부족하다. 후진국에는 도시 이주를 바라는 수십억 명의 사람이 있다. 새로운 도시 환경에 대한 엄청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기존 도시들을 확장할 수도 있지만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수도 있다. 차터 시티 구상은 새로운 도시 건설로 문화적 변화의 과정을 가속화하자는 것이다. 미국이나 한국은 이미 상대적으로 도시화가 많이 진전돼 도시로 이주하길 바라는 농업지역 사람이 많지 않다. 미국이나 한국이 대규모 이민을 받아들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현재로서는 선진국들은 대규모 이민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시 건설은 후진국이 주무대다.”

-한국은 느린 성장에서 빠른 성장으로, 빠른 성장에서 다시 느린 성장으로 옮겨갔다.
“선진국이 주도하는 ‘기술의 프런티어(technological frontier)’에 다가갈 때에는 빠른 성장이 가능하다. 개방이나 규칙 시스템의 변화를 통한 따라잡기(catch-up)가 끝나고 기술의 프런티어에 근접하면 성장이 둔화된다. 기술의 프런티어에 거의 다다른 한국은 이미 알려진 것을 모방해도 이익이 그 전만 못하다. 전해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은 훨씬 어렵고 더딘 과정이다.”
‘중진국 함정’은 숙명 아니다

-중진국 함정(middle-income trap)이나 선진국 함정(high-income trap)은 어쩔 수 없는가.
“중진국 함정, 선진국 함정이 일반적인 현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나 기업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이들은 협력을 통해 엄청난 이득을 얻는다. 협력은 규칙의 시스템(a system of rules)을 통해 이뤄진다. 규칙은 또한 고성장과 성공적인 혁신을 가능하게 한다. 문제는 한때 효과적이었던 규칙들이 세상이 바뀐 다음에도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규칙이 바뀌지 않으면 성장이 둔화된다. 성장률 둔화 원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프런티어에 다가감에 따라 성장률이 둔화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규칙을 수정하지 않아 발생하는 성장률 둔화는 피할 수 있다.”

-문화와 경제 성장은 어떤 관계인가.
“문화는 법과 더불어 규칙을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다. 문화의 핵심적인 요소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 문화에는 끈질긴 생명력이 있다. 하지만 문화는 매우 빨리 변화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남한과 북한은 분단 이후 매우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남한의 문화는 세계 다른 나라들과의 상호작용, 투자, 교육 등에 대응하며 변화했다. 경제 성장을 북돋우기 위해 문화를 바꾸는 것은 세계 모든 나라에 열린 옵션이다.”

복지 핵심은 보다 많은 기회와 보호
-한국은 모든 정치 세력이 보다 많은 복지를 약속하고 있다. 어떤 복지를 선택해야 하나.
“어떤 복지를 선택할 것인가는 사람들이 살고 싶어하는 사회의 종류를 선택하는 문제다. 많은 사람이 보다 많은 평등, 특히 기회의 평등이 더 많은 사회에 살고자 할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극단적인 불행이나 위험으로부터 더 많은 보호를 보장하는 사회를 바랄 것이다. 기회와 보호를 제공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더 많은 기회와 보장을 제공하는 복지를 결정할 때 한국의 유권자와 국민은 이 두 목표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을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흔한 복지 유형이라고 해서,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이 표방한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모방하지 말아야 한다. 보호와 기회를 보장하는 여러 시스템 중에서도 다른 것들보다 더 잘 작동하는 것들이 있다.”

-세계화는 경제 성장을 위해서 좋은 것인가. 점차 더 많은 사람이 그렇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세계화는 명백히 세계 곳곳에서 활용 가능한 자원과 기회를 증진시킨다. 세계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은 세계화로부터 얻는 과실이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득, 어떤 사람들을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적어도 충분한 정보가 있는 사람들은 분배 문제를 제기하지 세계화 자체가 나쁘다고 하지는 않는다. 누구에게나 좋은 세계화의 성과도 있다. 예를 들면 질병을 퇴치할 수 있는 신약이 발견되면 전 세계 사람들이 그 약의 원산지를 따지지 않고 치료에 사용한다. 이러한 의미의 세계화, 가치 있는 지식을 전 세계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명백히 지지할 만한 것이다.”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는 말은 경제학자들에게도 의미가 있는가.
“세계는 계속 변화한다. 변화를 기술하는 표현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은 좋아하지 않는다. 보통 ‘모던(modern)’이라는 말은 가장 최근의 것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는 20년, 50년 전 세계와 다르다. 한국이나 미국이 직면한 사회 구조에 대한 도전은 20년 전과 다르다. 우리가 계속 적응하는 게 중요하다. 특히 규칙을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켜야 한다. 법이나 옳고 그름에 대한 규범도 세상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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