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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 칼럼

“녹슬기보다 닳아서 없어지기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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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아무리 딸뻘이라지만 남의 집 처녀 방으로 불쑥 들어서기가 좀 미안했다.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승용차로 4시간 달려야 나타나는 타가야 마을. 대문도 현관도 없었다. 모기장 쳐진 문을 열자 바로 방이었다. 사방 벽에 미얀마어 단어 쪽지가 붙어 있었다. ‘방해하다, prevent’와 동글동글한 미얀마어 철자를 병기하는 식이다. KOICA(한국국제협력단) 봉사단원 안주영(25·여)씨는 경성대 제품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지난해 10월 이곳에 왔다. KOICA의 원조로 세워진 타가야 직업훈련원에서 컴퓨터 활용 디자인(CAD)을 가르친다.

 “나름 밝은 성격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처음에는 흔들릴 때도 있었어요. 울기도 했고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은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현지인들은 대개 웃어넘기는 것을 보면서 마음부터 편히 다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산의 집에선 손빨래 하나 안 해본 그녀였다. 지금은 틈날 때마다 동네 돌아다니며 밥 얻어먹고 수다 떠는 마당발이 되었다. 부엌에 팔뚝만 한 도마뱀이 들어와도 이젠 놀라지 않는다. 개인 승용차는 물론 대중교통도 없는 벽촌이다. 현지인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번 차를 빌려 시내에 나가 장을 본다. 내년 여름 귀국 후의 일은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고향을 생각하면 마음만 산란해지니까. 안씨가 방 벽에 붙여놓은 영국 신학자 조지 휫필드(1714~70)의 명언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찡해졌다. ‘녹슬어 없어지기보다는 닳아서 없어지기를!’

 지난주 미얀마를 다녀왔다. 워낙 더운 나라라 아직도 한증막에 다녀온 느낌이다. 안주영씨 같은 자랑스러운 젊은이들과 타국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퇴직 공무원을 만났다. 수도 네피도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시골마을 예진은 국립농업연구소와 미얀마 유일의 수의과대학이 있는 곳이다. 경북대에서 원예학을 전공한 백다은(26·여)씨가 연구소에서, 시니어 봉사단원 박병옥(60) 수의사가 수의과대학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고생스럽기는 어디나 똑같다. 방글라데시에 파견됐던 한 봉사단원은 도착 후 일주일간 먹지도 자지도 화장실에도 못 가고 고생하다 결국 중도 귀국했다.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사망하거나 강도를 만나 중상을 입은 경우도 있다.

 KOICA에서 개발도상국으로 파견한 봉사단원(KOV·Korea Overseas Volunteers)은 현재 1600여 명. 최빈국 미얀마에는 20명이 있다. 미얀마는 오랜 군부독재에서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다지만 안정됐다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내가 방문한 지난주에도 학생운동 지도자 20여 명이 체포됐다가 하루 만에 풀려났다. 그래도 미국이 지난 11일 미국 기업의 미얀마 투자 허용을 발표하는 등 탄력이 붙고 있다. 9월부터는 대한항공이 주 4회 직항편을 띄운다. 무엇보다 미얀마 사람들이 한국에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발전한 경험을 높이 사는 데다 한류 붐이 날개를 달아주었다. 미얀마 TV가 방영 중인 외국 드라마 중 한국 드라마 비중은 90% 이상이다. 양곤의 세도나 호텔 아침 TV방송에서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길래 자세히 보았더니 2009년 인기 끌었던 ‘하얀 거짓말’이었다.

 원조를 하되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만 해도 어린 시절 미군이 준 밀가루 신세를 졌다. 분말우유를 받아 허겁지겁 먹고 나서 되게 설사한 기억이 있다. 중학교 땐 평화봉사단원에게 영어를 배웠다. 고마운 기억이다. 한국은 그렇게 컸다. 그러나 요즘엔 개도국 원조 방식을 놓고 전 세계적으로 반성의 목소리가 높다. 대한민국처럼만 커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나라가 훨씬 많다. 그래서 잠비아 출신 경제학자 담비사 모요는 “원조가 아프리카를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원조가 보노, 밥 겔도프 같은 스타들의 엔터테인먼트 상품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서구 정부에 압력을 넣어 100만 달러어치 모기장 10만 개를 아프리카에 보내면 현지 모기장 제조업만 파탄 날 뿐이라고 지적한다(담비사 모요 『죽은 원조』).

 KOICA는 서구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맞춤형 원조에 중점을 두고 있다. 도와주기 전에 수요국이 무엇을 원하는지 묻고, 철저한 현지조사를 거쳐 분야와 방법을 결정한다. 고기 몇 마리보다 그물을, 나아가 그물 짜는 법을 가르치고자 한다. 옳은 방향이다. 나는 결정적인 열쇠는 안주영 봉사단원 같은 ‘사람’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직접 뛰어들어 현지인과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는 원조다. 누가 우리 젊은이들을 나약하다 했는가. 지구촌 오지를 누비는 그들을 보면서 어느새 안락함에 물든 내 생활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