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신작 '트래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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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픽'은 영화보다 소문이 빨랐던 경우다. 화려한 수상경력은 이 작품에 기묘한 후광을 입히기에 충분했다. 뉴욕 비평가협회 작품상과 감독상 수상작, 전미 비평가협회 감독상 수상작, 피플지 선정 올해 최고의 영화, 골든글로브 5개부문 노미네이트작, 그리고 아카데미 노미네이트에 이르기까지. 감독의 유명세도 한몫했던 것 같다. 최근작 '에린 브로코비치'로 줄리아 로버츠라는 스타의 얼굴과 이미지를 마음껏 유용한 바 있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신작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해외의 비평은 찬사 일색이다.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설교가 없다는 이유로 힘이 넘치는 영화"라고 평했으며 '뉴욕 타임즈'는 '뉴욕 타임즈'는 "피할 수 없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위대한 영화"라고 상찬했다. 과연, 소문만큼 대단한 영화일지 궁금해진다.

하비에르와 동료 마놀로는 멕시코 국경을 지키는 경찰이다. 그들은 살라자르 장군 밑에서 일하게 되는데 장군은 마약조직과 연계를 맺고 뒷거래를 하고 있다. 하비에르와 마놀로는 장군 몰래 미국 마약단속국 사람들에 정보를 넘기려고 한다. 한편, 오하이오주 대법원 판사 로버트는 마약 단속국장에 임명되지만 자신의 딸이 마약 복용자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처음에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은 로버트는 딸을 방치하지만 그녀가 집에서 마약을 흡입하는 장면을 보곤 경악한다.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집나간 딸은 거리에서 몸을 팔며 마약을 구하러 다닌다. 그리고 헬레나는 남편 카를이 범죄 혐의를 받고 구속된 뒤 그가 마약 거래 조직의 거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이미 극영화 데뷔작인 '섹스 거짓말 비디오테입'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바 있다. 나이 서른이 채 되기도 전에 거장감독만 누릴 수 있는 영예를 미리 맛본 것이다. 심지어 '시민 케인'의 오슨 웰즈 감독과 비교하며 그를 영화 천재로 떠받드는 평자도 있었다. 이후 다소 부진했다. '카프카'와 '리틀 킹' 같은 차기작들은 "천재로서의 재능이 의심스럽다"는 평을 받으면서 소더버그 감독을 슬럼프로 밀어넣은 바 있다.

그런데 전세는 역전된다. '표적'과 '에린 브로코비치' 등의 장르물을 만들면서, 줄리아 로버츠, 조지 클루니 등의 스타를 기용한, 영민하기 그지없는 장르영화로 승부수를 던지는 솜씨로 소더버그 감독은 힘있게 부활했다. '트래픽'은 어떤 견지에선 소더버그의 회심의 역작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다. 해외의 여러 매체들은 이 영화를 지난해 최고의 미국영화라고 추어올리고 있는 중이다.

'트래픽'을 보면서 미국 거장감독들 이름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정연한 내러티브보다는 여러 배우들 연기 앙상블과 파편적인 이야기 구조를 선호한다는 점에선 로버트 알트만 감독을 떠올리게 되고, 한 부성父性의 시점을 거쳐 미국 사회의 모순을 하나씩 끄집어내는 솜씨는 마틴 스콜세지나 폴 슈레이더 감독을 닮았다. 소더버그 감독은 영화에서 수많은 미국 장르영화를 인용하고, 거장들 작업을 가볍게 상기시키면서 영화를 끌어간다.

막상 영화 '트래픽'에 대한 감독의 설명은 단순하다. "난 도그마 선언의 방식과 전통적인 할리우드 영화의 방식을 결합시키면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했다. 도그마 선언의 미학적인 면을 빌려다가 할리우드 스타들이 출연하는 영화를 만들면 관객들이 좋아할 것 같았다"라는게 소더버그 감독의 말이다. 미국 오하이오와 워싱톤을 비롯해 멕시코 사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소를 마구 헤집으면서 감독은 다양한 필터를 이용해 각각의 장소를 특징적인 색채로 포장해낸다.

마이클 더글라스와 캐서린 제타 존스 등의 스타들은 여기서 각 에피소드의 작은 소영웅, 그것도 조연급에 지나지 않는 연기를 하고 있다. 이렇듯 복잡하면서 '튀는' 영화에 대한 절대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지만, 최소한 '트래픽'은 미국 장르영화를 이정도로 능란하게 해체하고 재조립해내는 작품은 앞으로 쉽게 나오질 않을 것이란 짐작이 들도록 한다. 같은 이유로 수작이라 칭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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