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포르투갈 선수들 “제발 비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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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환

안정환(36) K-리그 명예홍보팀장은 요즘 바쁘다. K-리그를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바쁜 일정이지만 마음만은 가볍다.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팬들에게서 받은 사랑을 조금이나마 돌려줄 수 있어서다.

 꼭 10년 전인 2002년 6월 22일은 한국이 ‘무적함대’ 스페인을 꺾고 한·일 월드컵 4강행을 확정 지은 날이다. 역사적인 날에 맞춰 안 팀장이 중앙일보와 만났다. 그는 “2002월드컵을 통해 ‘한국인은 축구를 진정으로 좋아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고 했다.

 안 팀장은 그간 공개하지 않았던 2002년의 에피소드들을 털어놓았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 “2000년부터 2년가량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뛴 경험이 있어 이탈리아와의 맞대결을 은근히 기대했다”고 언급한 그는 “경기 전 나와 친근하게 인사를 나눈 이탈리아 선수들이 킥오프 직후 돌변했다. 일제히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내게 퍼붓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페루자 시절 한솥밥을 먹으며 친구처럼 지낸 수비수 마르코 마테라치도 있었다”고 했다. 이탈리아어를 열심히 공부해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안 팀장은 당황했지만, 옛 친구의 욕설을 자극제 삼아 더욱 열심히 뛰었다. 그리고 연장전에서 골든골을 터뜨렸다. 안 팀장은 “그 골 때문에 페루자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됐지만, 강호 이탈리아를 이긴 것만으로도 충분히 통쾌했고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황당한 에피소드는 조별리그에서도 있었다. 안 팀장은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최종전 도중 검은 거래(?)를 제의받았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 라치오에서 뛰던 수비수 쿠투가 다가와 손가락으로 폴란드가 미국에 앞서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고 했다. ‘비기면 함께 16강에 올라갈 수 있으니 살살 하자’는 사인이었다. 쿠투 이외에도 네 명가량의 포르투갈 선수들이 이탈리아어로 “제발 비기자”고 애원했다. 이와 관련해 안 팀장은 “포르투갈 선수들은 우리가 16강에 오르면 병역 혜택을 받는 줄 몰랐을 거다. 당시엔 우리도 필사적이었다”면서 “무조건 이겨 16강행을 확정 짓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나는 당시 군 미필 선수 중 나이가 가장 많았다. 대회 기간 중 수시로 군 미필 후배들을 불러모아 ‘더 열심히 뛰자’고 독려했다. 당시 언론이 우리가 둥그렇게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많이들 찍었지만 그런 대화를 나누는 줄은 몰랐을 것”이라며 미소 지었다.

 안 팀장이 K-리그 명예홍보팀장 역할을 수락한 건 2002월드컵 멤버로서의 책임감 때문이다. 그는 “남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축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최근 K-리그의 인기 저하에 우려를 느꼈다. 2002년을 기억하는 축구팬들이 나를 보며 다시 한번 당시의 감동을 떠올리길 바랐다”고 했다.

 축구의 인기를 되살릴 방법으로 안 팀장은 ‘스토리 발굴’을 제안했다. “2002년엔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모든 국민이 축구대표팀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했다”고 말한 그는 “흥미를 가질 만한 이야깃거리가 있으면 눈과 마음이 모이게 마련이다. K-리그도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선수 안정환 못지않게 ‘안 팀장’이라는 호칭도 마음에 든다”면서 “팬들에게 좀 더 다가서는 스킨십 마케팅에 주력할 생각이다. 필요하다면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송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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