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린 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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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호 32면

간만에 장인어른, 그리고 사랑스러운 아들과 딸이 한자리에 모였다. 인생에서 부족한 거라곤 하나도 없는 외과의사 헨리 퍼론에게 모처럼 온 가족이 모인 행복한 저녁식사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아내 로설린드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집에 들어선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뒤에 칼을 든 박스터와 그의 똘마니의 그림자와 함께. 헨리의 뇌리에는 낮에 있었던 교통사고가 바로 떠올랐다. 박스터를 대장으로 하는 불량배 세 명에게 포위됐을 때 헨리는 자신이 가진 의학 지식으로 박스터를 궁지에 빠뜨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헨리의 시도는 성공했고, 폭력을 당할 위기를 무사히 넘기게 됐다. 그렇다. 헨리는 뒤늦게 자신이 뒷골목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강신주의 감정 수업 <14> 치욕, 혹은 잔인한 복수의 서막

박스터가 헌팅턴병을 앓고 있음을 알아본 헨리는 박스터로 하여금 똘마니들 앞에서 불치병 환자로서의 연약한 허점을 드러내게 만든 것이다. 이 부분이 이언 매큐언의 소설 『토요일(Saturday)』의 가장 극적인 장면이다. 사실 박스터는 헨리 퍼론이 의학 지식으로 자신을 압박했을 때 극도의 치욕감을 느꼈었다. 매큐언은 참혹한 복수를 꾀하도록 만든 박스터의 치욕감을 이렇게 묘사한다.

박스터가 자신이 약간의 모욕과 약간의 권력 남용에 속아 넘어갔다며,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또 한 차례의 급격한 정신적 기상 변화, 새로운 기분 전선이 다가오고 있어 불안하다. 그는 혼잣말을 멈추고 헨리에게 바짝 다가와 금속성 구취를 풍긴다.
“이 구정물 같은 새끼.” 박스터는 이렇게 내뱉더니 그의 가슴을 밀친다. “나를 갖고 놀아? 애들 앞에서? 내가 신경이나 쓸 것 같으냐? 어, 그래, 당신, 아주 X새끼야.”

의사와 환자라는 프레임에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은 의사이고, 두목과 똘마니라는 프레임에서 우월한 사람은 물론 두목이다. 접촉 사고가 났을 당시 헨리는 박스터와 두 똘마니보다 열등한 지위에 있었다. 하긴 체육관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낸 강건한 뒷골목 건달 앞에서 모범생이었던 나약한 외과의사가 얼마나 힘을 쓸 수 있을까.

그렇지만 순간적인 기지로 헨리는 무지한 박스터에게 의사와 환자라는 거미줄을 걸어버린 것이다. 헨리가 세 명의 건달보다 순간적으로 우월해지는 순간이었다.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만 박스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보통 환자처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온순해져서 헨리의 진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니까.

박스터는 심한 치욕감을 느꼈다. 똘마니들 앞에서 나약한 외과의사에게 좌지우지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장수가 우유부단하였으며, 대원들은 투항했으니 더 이상의 치욕은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외과의사 헨리가 던진 거미줄, 그러니까 의사와 환자라는 프레임에 걸려들어버렸다. 박스터는 분통이 터졌지만 헨리에게 욕지거리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박스터의 치욕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치욕(Pudor)은 우리가 타인에게 비난받는다고 생각되는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중)
스피노자가 말했던 것처럼 치욕은 타인이 자신의 어떤 행동을 비난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내면에 발생하는 감정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타인이 비난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타인이 비난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느냐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박스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두 명의 똘마니가 실제로 박스터를 비난했을 수도, 혹은 비난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박스터는 그들이 두목이었던 자신을 비웃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뒷골목 세계에서 유일한 자긍심은 졸개들로부터 존경받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 박스터는 졸개들이 보는 앞에서 무엇인가 장애가 있는 환자로 대접받았던 것이다. 아무리 뒷골목의 건달이라도 이 경우 어떻게 치욕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헨리는 바로 이것을 건드린 것이다.
행복이 예감되는 저녁 만찬에 박스터가 똘마니를 데리고 난입한 것, 이것은 치욕을 갚기 위한 연극이었다. 똘마니에게 자신이 헨리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치욕을 갚을 수 있겠는가.

잊지 말자. 뒷골목 건달에서부터 상류층 인사들까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물론 이런 욕망은 허영일 수도 있고, 혹은 덧없는 인간의 자존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바로 이런 허영과 자존심이 좌절됐을 때 인간은 치욕감에 몸을 떨게 된다. 치욕을 푸는 길은 그것을 가져다준 사람에게 복수하는 것밖에 없다. 토요일, 헨리가 당혹감 속에서 알게 된 것도 바로 이것이다. 타인에게 가한 치욕은 언젠가 예상치 않은 파국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대중철학자. <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상처받지 않을 권리> 등 대중에게 다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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