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 운명 손에 쥔 38세 치프라스 … 존경하는 인물 차베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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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로이터=뉴시스]

17일(현지시간) 그리스에서 치러지는 재총선. 38세의 정치인 알렉시스 치프라스에게 세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그는 제1당 자리를 노리는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의 당수다.

 치프라스가 지난달 하순 독일을 방문했을 때다. 기자회견장에선 카메라 셔터 소리와 플래시가 5분 이상 이어졌다. 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마치 축구스타 같네요.” 인구 1100여만 명의 소국인 그리스. 이 나라의 야당 대표가 주목받는 건 이번 선거에서 그가 이끄는 시리자가 승리할 경우 커다란 후폭풍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리스 재총선 앞두고 촉각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선거를 앞둔 세계경제는 갈림길에 서 있다. 재총선 결과 중도우파 신민당이 제1당이 되면 그리스는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 유럽위원회(EC) 등 이른바 ‘트로이카’와 맺은 긴축안을 이행하고, 트로이카는 추가 구제금융을 지원할 가능성이 크다. 이 길은 외환위기 때 한국을 비롯한 중남미의 여러 나라가 갔던 보릿고개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빚을 갚아 나가는 고난의 길이다.

 시리자가 승리하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치프라스는 구제금융 조건(긴축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공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긴축안이 너무 고통스러우니 재협상을 하겠다는 의도이겠지만 최악의 경우 판을 깰 것이란 게 시장의 우려다. 그리스가 채무불이행(디폴트) 선언과 함께 유로화를 버리고 옛 통화인 드라크마로 복귀한다면 시장은 그 뒤를 따르는 다른 재정위기국에 눈을 돌릴 것이다. 이는 유로존의 붕괴, 나아가 세계경제의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스 유권자가 시리자를 선택한다면 가공할 판도라 상자를 여는 열쇠는 치프라스의 차지가 된다. 이 길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지뢰밭의 연속이다.

 대중 사로잡는 웅변술

 치프라스는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해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토목공학은 가업과 관련이 있다. 그는 작은 건설업체를 운영하는 아테네 중산층 가정에서 군사정권(1967~74년)이 종식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주 관심사는 학생운동이었다. 그는 운동권 출신이다. 고교 시절 공산당청년연합에 가입해 교육제도 개혁에 항의하며 동료와 함께 학교를 점거했다. 전국학생연맹 중앙위원(95~97년)으로 활약했다. 졸업 후 건설 분야에서 잠시 일하다 시나스피스모스(좌파·생태운동)당에 가입해 당의 청년연맹 대표(99년)를 지냈다. 2001년에는 제노바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려다 이탈리아 경찰에 저지당하기도 했다.

 치프라스는 언변이 뛰어나다. 침착하고 부드럽다. 깔끔한 단발, 넥타이를 매지 않는 차림에 아이패드와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완벽주의 기질을 자랑한다. 동성애자에게 관대하고, 스스로 결혼 대신 동거를 선택했다. 가정은 잘 챙긴다. 종종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며 회의를 끊는다고 한다. 오토바이를 즐겨 탄다. 기성 정치인이 갖추지 못한 참신성을 갖췄다. 젊은이들은 그에게 열광적 지지를 보낸다. 치프라스는 대중을 움직이는 동물적 감각, 선동 자질을 지녔다. 32세이던 2006년, 아테네 시장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3위에 올랐다. 그가 그리스 유권자의 마음을 흔든 것은 이 나라 정치권의 구태와 악습 때문이다. 그리스에는 세습 정치인이 많다. 특권을 누려온 상당수 정치인이 부패했다. 그런 정치 풍토에서 대중의 지지를 밑천으로 삼는 치프라스는 차라리 신선했다.

 그는 2008년 시리자의 대표에 올라 2009년 총선에서 의원이 됐다. 시리자는 당시 13석을 확보했다. 바로 그해 9월 그리스의 재정위기가 시작됐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당시 총리가 “과거 정권의 재정통계가 엉터리”라고 고백하면서다. 재정위기는 그리스에 구제금융 대가로 긴축정책의 고통을 강요한다.

 이후 치프라스는 야권 연대 투쟁에 돌입한다. 시리자는 채무 상환 중지, 긴축 중지, 금융지원 재협상을 내걸었다. 유권자의 호응에 힘입어 시리자는 지난 5월 총선에서 제2당으로 약진했다. 그때부터 당수 치프라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세계 금융시장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시리자는 제1당 자리를 놓고 신민당과 경쟁하고 있다. 신민당은 긴축 노선, 유로존 잔류를 공약하고 있다.

벼랑 끝 전술

 치프라스는 그리스가 처한 최악의 상황을 오히려 유리한 카드로 돌변시켰다. 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포커 게임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공포의 치킨 게임이다. “유로화는 17개 회원국으로 구성돼 사슬처럼 연결돼 있다. 가장 약한 고리, 즉 그리스가 부서지면 사슬 전체가 연쇄적으로 끊어진다.” 긴축에 지친 유권자들이 후련해하는 독설, 초강경 발언이 그의 단골 메뉴다.

 그는 “유럽 각국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며 재정긴축 프로그램을 3년간 동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페인의 ‘긴축 없는 구제금융’을 그리스에 적용하라는 말이다. 치프라스는 그리스 국민의 반(反)독일 정서도 적절히 활용했다. 그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점령당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그리스에 유로존 잔류 여부를 놓고 국민투표를 하라고 요구하자 치프라스는 기다렸다는 듯 반격했다. “그리스는 독일 보호령이 아니다.”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

 치프라스는 그리스가 빚 탕감을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유로존에는 집주인도 임차인도 없다”며 “그리스 문제는 그리스 특유의 문제가 아닌 유럽이라는 틀 전체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유럽의 문제에서 발생한 채무이니 그리스에 상환을 강요하지 말라는 의미다. 이는 지난해 4월 그리스의 전직 저널리스트가 내놓은 독립 다큐멘터리 ‘부채의 지배(Debtocracy)’ 논리와 비슷하다. 이 영화는 그리스 부채의 해결책으로 에콰도르가 택했던 방법을 권하고 있다. 이른바 ‘더러운 채무(Odious Debt) 이론’이다. 좌파 지식인 라파엘 코레아는 2006년 말 에콰도르 대선에서 승리한 뒤 회계위원회를 설치해 외채의 내용을 일일이 검토한 뒤 소위 과거 독재정권이 부패한 방법으로 부정축재 등을 위해 빌린 ‘더러운 채무’를 갚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빚 탕감을 외치는 치프라스는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 ‘유로존의 운명을 한 손에 쥔 남자’로 불린다. 지난 총선 후 그가 재빨리 독일과 프랑스를 방문해 그에 대한 그리스 밖의 의구심을 풀려고 한 것도 이 같은 낙인을 의식해서다. 독일 등에서 그는 “우리는 반(反)유럽은 아니며, 오히려 유럽의 사회적 유대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긴축조치가 유럽 전체를 불안정하게 하므로 그것과 싸우는 자신들은 유럽을 지키는 세력이라는 논리다. 그는 “내가 정권을 잡으면 새로운 정책 조합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위험한’ 유로존 탈퇴 주장에서는 후퇴했다. 그는 지난 3일 보수 일간지인 카티메리니 일요판 인터뷰에서 “그리스나 유로존 모두에 그리스의 유로존 이탈은 대안이 안 된다”며 “유로존 이탈 주장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는 언론과 그 배후 세력은 스스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집권해도 앞날 험난할 듯

 치프라스는 시리자가 집권할 경우 “가장 먼저 긴축정책과 관련한 법령을 폐지할 것”이라며 “그리스 의회는 그럴 권한이 있고 거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급여와 인력을 감축하는 긴축정책보다 공공부문의 부정부패와 뇌물수수, 특혜를 없애는 게 더 효율적”이라며 “부자들과 관광·해운 산업이 누리는 감세 또는 면세 혜택을 폐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치프라스는 13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 기고에서 4년 내 직접세의 비중을 유럽 평균인 국내총생산(GDP)의 4% 이상으로 올리고 모든 국민의 소득과 자산을 확인하기 위해 세금제도를 재정비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공약으로 부유층 증세를 내걸었다. 고통받는 그리스 유권자에게는 달콤하고 솔깃한 공약들이다.

 하지만 시리자 내부 사정이 복잡해 집권하더라도 앞날이 순탄하지는 않을 듯하다. 시리자는 세 개의 깃발이 나부끼는 마크처럼 10개 이상의 소그룹으로 구성돼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도 있고, 환경보호를 중시하는 활동가와 경찰에 돌을 던진 과격파도 있다. 외국 정치인들에게 치프라스는 이단아다. 치프라스가 재협상을 말하고는 있지만 그는 협상을 잘 모른다.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급진 학생운동권 출신의 치프라스는 동료와 협상하는 법이 없다”는 아테네대 교수의 말을 인용해 “치프라스가 저항의 정치술을 유럽과의 싸움에 활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게다가 시리자는 국정운영의 경험도 실적도 없다. 후폭풍을 감당할 능력이 부족해 시리자와 치프라스가 유로존 탈퇴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것이란 관측이 일각에서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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