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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음식잡설 (24) 배추값보다 싸게 산 김치가 찜찜한 이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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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면

박찬일 음식 칼럼니스트

1970년대 일이다. 고추가 대흉작을 기록하자 김장을 담가야 하는 시민들의 민심이 흉흉해졌다. 결국 인도와 멕시코 등지에서 듣도 보도 못한 고추를 수입하는 미증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가구별로 쿠폰을 발행하고 이상한 때깔의 수입고추를 동사무소에서 배급했다. 그해의 김장 맛은 쓰고 떫었다. 색깔도 형편없이 거무튀튀해서 도무지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김치는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민심을 움직일 만큼 중요한 음식이었다. 민심뿐만 아니라 군심(軍心)도 움직였다. 김치가 없어 사기가 떨어질 기미를 보이자 주월사령부는 본국에 김치를 긴급 요청했다. 한국 최초의 김치통조림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요즘 김치 없이는 못 산다는 사람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다양한 요리가 생기고, 사람들의 입맛도 많이 바뀌었다. 그래도 김치는 여전히 음식 이전에 일종의 민족적 상징이다. 심하게 말해 ‘한국인=김치’라는 등식이 국제적으로 통용될 정도다. 우리는 김치를 먹든 먹지 않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의 상징으로 그걸 수용한다. 된장·고추장은 담그지 않아도 김치만큼은 아직도 담가 먹는 사람이 많다. 한국어는 한 마디도 모르는 이민 3세, 4세도 김치를 통해 모국과 끈끈한 심리적 연대를 이어간다.

그런 김치가 차마 손보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지고 있다. 내가 일하는 식당에도 직원용 김치가 납품된다. 직접 담글 형편도 안 되고 담글 줄 아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수증을 보고 깜짝 놀랐다. 10kg에 2만원. 나는 ‘0’ 하나가 도망간 줄 알았다. 그렇다면 너무 비싼 값일 것이다. 경리담당자에게 물으니 맞다고 한다. 묵직한 10㎏ 김치가 고작 2만원이었다. 직접 배달까지 해주고도 그 값이었다. 더 많이 쓰는 일반 식당에는 1만5000원짜리도 납품된다고 한다. 믿을 수 없었다. 지방에서 배추 농사를 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김치와 배추의 유통을 잘 알고 있었다. 절인 배추가 보통 10kg에 소비자가격이 2만원을 넘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사들인 김치는 절인 배추값보다 더 싼 김치였다. 알다시피 김치는 배추보다 양념값이 더 비싸다.

고춧가루는 금값이고 마늘이며 생강·젓갈 값도 만만치 않다. 그걸 생산하고 유통하면 또 비용이 발생한다. 아무리 대량 구매를 통해 싼 재료를 쓰더라도 10kg에 2만원은 내 상식으로는 나오기 어려운 값이었다. 인터넷으로 시중의 김치값을 알아보니 같은 무게에 5만~10만원 선이었다. 내가 가늠하는 적당한 가격이기도 했다.

이런 초저가의 김치가 유통되는 건 우리 주머니 사정 때문이다. 한 끼에 5000원 안팎을 고수해야 하는 서민형 밥집의 애로사항이 그 김치값의 주 요인이기도 할 것이다. 너무 낮은 밥값과 무료로 달라는대로 더 줘야 하는 김치 인심을 떠올리면 왜 그런 김치가 유통될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된다. 그래도 우리의 자존심 같은 김치가 그렇게 무너지고 있다는 건 불편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다. 거기에다 지나치게 많은 식당과 영세 자영업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명퇴자들, 끝없는 경쟁과 폐업, 붕괴되는 가정까지…. 10kg에 2만원짜리 김치가 던져준 우리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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