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한 합의가 도출되기까지, '12명의 성난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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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한 명은 있다니까." 어느 가장 더운 여름날, 한 살인 사건의 평결을 내려야할 배심원들 사이에서 누군가 볼멘 소리를 지른다. 열 두 명의 배심원들 가운데 열 한 명이 이미 같은 의견을 모았는데, 유독 한 사람만이 그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방에 모인 이 배심원들이 이 날 맡은 사건의 피고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열 여덟 살의 한 소년. 이 패륜아가 범행을 저지른 것을 직접 보았다는 목격자들의 진술도 이미 들은 상태다. 게다가 슬럼가에서 엉망으로 자라난 그 소년은 아버지로부터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해왔다니 범행 동기도 충분하지 않은가.

열 한 명의 배심원들은 당연하게도 그 소년이 유죄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단지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결정은 만장일치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니까 이 예외적인 한 사람이 다른 열 한 사람들을 설득해 의견을 일치시키든가, 아니면 그 반대로 열 한 사람이 나머지 한 사람의 의견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숨막힐 듯 무덥던 그 날의 열띤 격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에 비록 대세를 거스르는 의견을 보여주긴 했지만, 배심원 8번으로 불리는 그 남자(헨리 폰다)가 사실 피고인 소년이 무죄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는 사건과 관련된 여러 증거들에 '정당한 의심'(reasonable doubt)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던 그 소년이 무죄(innocent)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적어도 유죄는 아니라고(not guily)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시드니 루멧의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그처럼 '정당한 의심'을 가진 사람을 옹호하는 영화다. 이건 이 영화가 바로 그 남자와 마찬가지로 미국식 민주주의나 또는 사법 체계 같은 거대 '시스템'에 정면으로 맞서는 유의 영화가 아니라고 하는 것과 동의어이다.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거창한 진리를 내세우지 않고 다만 '정당한 의심'이 들 때, 바로 그 때 합리적으로 서로 한 번 더 토의를 해보자고 권유한다. 그래야 민주주의의 주요 원칙으로서 올바른 '합의'가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야말로 상충하는 의견과 다양한 가치를 가진 많은 사람들을 조화롭게 조율할 수 있는 길이 아니던가,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합리적인 합의의 도출 과정이기도 한 이 영화의 밑바탕에는 그래서 당연하게도 '다원주의'의 가치가 깔려 있다. 서로 이름은 모른 채 단지 번호로만 구분되는 열 두 명의 배심원들은 직업, 가치, 성격 등의 면에서 이 사회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서로 의견상의 마찰을 빚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합리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 제각기 이런 저런 식으로 기여하게 된다.

어느 노인은 자신처럼 늙은 사람의 처지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 줄 수 있고, 안경을 쓴 사람은 또 그 나름대로 유용한 정보를 줄 수 있다. 심지어는 제대로 칼을 쓰는 방법을 알게 해 준, 슬럼가에서의 성장 경험까지도 다 쓸모가 있다! 민주주의 사회는 그렇게 조화를 일궈 가는 것이다.

이처럼 메시지만을 가지고 따지고 들면 고리타분하게 느낄 수도 있는 영화인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상당한 긴박감을 추진력 삼아 진행되는 흥미로운 서스펜스 드라마이기도 하다.

맨 처음과 마지막의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영화는 95분 정도의 러닝 타임 내내 배심원들의 토론이 이루어지는 실내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데, 레지날드 로즈의 치밀한 시나리오는 의견의 충돌과 반전(反轉)이 일어나는 그 실내 공간을 긴장간 넘치는 폐쇄 공간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드니 루멧의 영화 데뷔작인, 흥미로우면서도 진지한 이 드라마는 루멧 감독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만한 작품이다.
1957년 감독 시드니 루멧, 출연 헨리 폰다, 리 제이 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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