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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방 쓰기 있기 없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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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부부의 날,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났다. 우연히 동창인 걸 알고 나서 일을 핑계로 만난 자리다. 참 신기하다. 40년도 더 지난 세월에 기억마저 희미하건만 그동안의 빈 시간을 채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분이면 충분했다. 마음이 편해서일까. 그가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코골이, 그 대책은 없는가’로 시작된 그의 고민. 사연은 이랬다. 코골이가 심해 안방에서 쫓겨났단다. 예민한 성격을 가진 그의 부인이 불면증까지 호소한다는데 별다른 수가 있었겠는가. 처음 며칠은 잠자리도 넉넉하고 오히려 편하기까지 했던 것이 날이 갈수록 좀 이상하더란다. 30년 이상을 같이 산 부인이 괜히 남같이 서먹서먹해지기도 하고 집안 분위기도 좀 낯설어지고. 예전엔 그나마 코 곤다고 구박하고 구박받고 뭔가 오고 가는 것이라도 있었건만 그마저 없어지니 대화도 줄고. 일은 많아 저녁 먹고 오는 날이 많은데 그야말로 아침 시간 잠깐 얼굴 보는 게 전부이고.

 ‘아무래도 부부는 각방 쓰는 건 아닌 것 같더라. 술 마시면 코골이가 더 심하다고 하기에 술도 줄였건만 이 나이에 뭘 핑계로 다시 한방 쓰자고 하냐? 요즘 나라에서 사회복지 신경 많이 쓰던데 이런 건 신경 좀 안 써주나? 돈 몇 푼 보태주는 것도 중요한 복지겠지만 가정의 튼튼한 기반을 위해 ‘부부 한방 쓰기 캠페인’이라도 만들어야 되는 것 아냐? 주위에 물어보니 각방 쓰는 부부 엄청 많던데 말이야.’

 똑같은 경험, 얼마 전에 나도 해봤다. 알레르기 비염 때문에 코를 심하게 곤다고 모진 구박 끝에 안방에서 쫓겨났다. 실상은 자진해서 베개를 들고 나왔지만, 일단 나오니 다시 들어가기 정말 쉽지 않더라. 결국 한 달 넘게 각방을 쓰다가 ‘원 위치’하기는 했지만 그때 마음고생 참 많이 했더랬다.

 처음 며칠은 날아갈 것같이 속이 시원하고 자유로웠다. 밤늦도록 보고 싶은 책 맘껏 보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수시로 뒤집어가며 자도 되고. 코뿐 아니라 이를 박박 갈고 자도 어느 누구 하나 구박하는 사람 없는 나만의 공간. 이렇게 내게 행복을 주던 각방 쓰기의 시간들이 하루하루 지남에 따라 슬슬 허전해지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하루 한번 마주하는 밥상머리에서 별 할 말도 없고, 그나마 했었던 애들 얘기도 애들이 다 커버리니 ‘대화거리’도 옹색하고.

 그러던 어느 날 9시 뉴스가 끝나자마자 피곤해서 일찍 잔다며 남편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꼭 닫았다. 그 순간 닫쳐진 문 뒤로 남겨진 내 기분은 글쎄, 참 묘하더라. 다음 날은 내가 먼저 ‘꽝’ 소리까지 내며 방문을 닫고 먼저 들어가 잤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점점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앞당겨지더니 이젠 밥만 먹으면 일찌감치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서 컴퓨터를 켜고 일도 보고 TV도 보는 수준이 되어 버렸다.

 ‘따로 또 같이’란 말이 이런 건 결코 아닌데. 남편 맘도 그리 편치는 않은가 보다. 절대로 구박 안 할 터이니 안방으로 다시 들어오란다. 큰소리 치고 나왔는데 그냥 들어가기는 좀 쑥스러웠다. ‘못 이기는 척 다시 들어갈까. 아냐. 자존심도 있고 생각하기도 귀찮다. 허전하긴 하지만 이대로 그냥 각자 편히 살자.’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대로 살 만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가 점점 더 남같이 느껴진다는 것은 매우 큰 문제다. 머지않아 곧 ‘소 닭 보듯 하는’ 관계가 될 것이고….

 각방 생활 39일째 되던 날. 남편에게 기발한 선물을 하나 했다. “내가 안방으로 다시 들어가길 정말 원해? 그럼 낼 모레 화이트 데이에 ‘원 위치’ 할게. 그게 내 선물이야.” 덤으로 소리 요란한 공기청정기까지 하나 선물했다. 밤이면 코고는 소리까지 청정하게 해주는 그 기계 덕분에 아무리 싸워도 아직까지는 한방 쓰기를 잘 지켜내고 있다. 어쩌면 싸울수록 빠른 화해를 위해 한방을 쓰는 게 맞을 거다. 남녀 사이 기념일이 넘쳐나는 요즘. 각방 쓰는 부부들을 위해 이유 불문하고 부부의 날을 ‘무조건 한방 쓰는 날’로 만들면 어떨까.

 갈수록 늘어나는 각방 쓰는 부부들에게 못 이기는 척하고 ‘원 위치’ 할 수 있는 그럴듯한 핑계거리라도 하나 만들어 주고 싶어서다.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