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하면 이사도 못 가나”…대출규제에 베이비부머 한숨

조인스랜드

입력

업데이트

[황정일기자] 지난해 초 퇴직한 이재남(60•서울 성북구)씨. 이씨는 그동안 쌓인 피로도 풀 겸 은퇴 이후 줄곧 등산 등으로 소일을 하며 지냈다. 마땅한 소득은 없지만 퇴직금이 있어 생활에 큰 어려움은 못 느꼈다.

그런데 최근 난처한 상황에 부딪혔다. 수도권 외곽의 조용한 곳에 아파트를 마련해 이사를 가려고 했는데 대출이 안돼 포기했다. 이씨는 살고 있는 성북구 집을 팔고 1억원 정도 대출을 받아 수도권에 아파트를 사려고 했다.

그런데 은행에서 소득이 없다며 대출을 거부한 것이다. 서울•수도권의 경우 총부채상환비율(DTI)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씨처럼 소득 증빙이 어려운 경우 시중은행에서는 대출이 안 되거나 된다고 해도 소액이라는 게 은행의 설명이다.

이씨는 “제2금융권 등에서 대출을 할 수도 있지만 이자가 시중은행보다 연 4~5%나 높아 포기했다”며 “은퇴한 것도 서러운데 은퇴하면 이사도 마음대로 못 가냐”고 말했다.

이사 가면 ‘신규 대출’ 적용

DTI란 총소득에서 대출 등 부채의 연간 원리금 상환액이 차지하는 비율로 현재 서울 50%, 경기•인천 60%가 적용되고 있다. 금융부채 상환 능력을 소득으로 따져서 대출 한도를 정하는 것인데 쉽게 말해 담보물(아파트 등 주택)이 있어도 일정 소득이 없으면 대출을 받을 수 없다.

집값이 자고 나면 오르던 시절 대출 받아 집을 사는 투자 행태를 막기 위해 도입한 제도다. 그런데 애꿎은 실수요만 애를 먹고 있다. 이씨처럼 기존 집을 팔고 서울•수도권에 아파트를 장만하기 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은퇴자 모두가 여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직장이 없어 일정 소득이 없더라도 월세를 받거나 연금 등에 가입해 연금을 수령하는 경우라면 이를 소득으로 간주하므로 대출에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연금 등의 액수가 제한적이므로 원하는 만큼 대출을 못 받을 수도 있다. 소득이 없는 은퇴자뿐 아니라 실수요자도 서울•수도권에서 직장 이전 등으로 이사를 가려면 적지 않은 비용을 추가로 들여야 한다.

살던 집에 대출이 있더라도 무조건 신규 대출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DTI 규제가 없을 때는 담보물 전환(담보물을 기존 집에서 새 집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무조건 신규 대출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역할 고민해야

이 경우 법무사 비용 등이 추가로 들 수 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획재정부 등 금융당국에는 DTI를 해제하거나 완화해 달라는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집값이 떨어지면서 DTI 규제의 명분이 사라지면서 이런 일이 더 심해지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DTI 완화에 회의적이다. 금융 규제를 풀어도 주택 시장 활성화 가능성이 낮은 데다 가계부채가 한계점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달 나온 5•10 부동산 대책에서도 금융 규제 완화가 빠졌다.

가계부채가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정부의 판단도 틀리진 않다. 하지만 가계 대출 증가는 부동산 값 상승과는 무관해 보인다. 최근 몇 년 새 집값이 약세를 보이고 있는 데다 주택 거래도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이다.

이런 마당에 대출 받아 집에 투자하는 경우가 몇이나 되겠는가. DTI 규제의 명분이 사라진 셈이다. 오히려 DTI 규제로 인해 이자가 적은 주택담보대출 대신 이자가 비싼 신용대출이 늘어 가계 부채의 안정성이 저해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DTI 전면 폐지가 부담스럽다면 적어도 이씨처럼 은퇴한 베이비부머나 실수요자가 고통받지 않도록 일부 완화하거나 다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적극적으로 듣고 해결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다.

<저작권자(c)중앙일보조인스랜드. 무단전제-재배포금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