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동안의 영어 연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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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현상이지만 우리는 늘 희생양을 찾습니다. 경제가 조금만 어려워지면 괜히 외제 자동차, 부유층의 과소비, 해외여행 등을 붙들고 시비를 겁니다. 물론 그 시비 거는 사람들의 진실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우리의 과시성 소비 수준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 때로 그런 모습을 보면서 위화감을 느끼기도 하고, 혀를 끌끌 차기도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시비는 별로 근거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선 자동차 수출국으로서 외제 자동차도 마땅히 수입해서 타야 하죠. 돈이 생기면 저도 미제 Jeep을 살 생각입니다. 디자인도 멋지고, 무엇보다 튼튼하잖아요. 기름을 조금 많이 먹는 것을 제외하면 너무나 매력적인 차입니다. 미리 이야기하지만, 언제가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제 연봉이 1억이 넘게 되는 날, 저는 아내에게 이 차를 뽑아주겠습니다. 그리고 함께 저 남쪽 바다로 여행을 떠나겠습니다.

또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가진 사람들의 소비를 꼭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단지 그 소비에 못지 않게 자선활동에도 열심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IMF 위기를 겪던 어느 시기에 TV에서 최소한의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아 경제활동이 위축되고 있다는 특집 방송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적절한 소비는 경제가 굴러가기 위한 필요조건입니다.

저축만 하는 일본 사람들의 습성 때문에 일본 정부에서 한시적 기한을 갖는 상품권을 무상 지급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오히려 능력도 없으면서 분별 없이 그 소비를 쫓아가는 사람들이 더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외 여행. 우리는 오래도록 폐쇄적인 삶을 살아온 민족입니다. 저는 별로 믿지 않으나, 단일민족이라는 자의식까지 겹쳐서 그 폐쇄성은 강도가 더 심했었습니다. 가난하기도 했죠. 그래서 저는 오히려 온 국민이 해외 여행을 했으면 싶습니다. 외제 물건을 사러 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삶도 얼마든지 살만한 것임을 깨닫는 여행 말입니다.

다른 삶의 가능성을 알아야 변화를 추구할 수 있지 않겠어요. 사실 나라가 어려운 것과 해외여행 사이에 커다란 관련이 있겠습니까? 저 부패와 무능으로 뒤범벅질 하고 있는 정치판과 행정부의 낭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꼭 어려움이 닥치면 마치 국민들 잘못인 양 이상한 타령을 늘어놓습니다.

저는 지금 유럽에 있습니다. 프랑스 클레르몽-페랑 단편 영화제를 참관하러 왔습니다. 이것이 끝나면 스페인 남부로 가서 세빌리아와 그라나다를 둘러보고 돌아갈 생각입니다. 오래도록 벼르던 장소인데다, 마침 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오랜 친구가 있어 같이 홀가분하게 나왔습니다.

이 여행을 끝내고 나면 여러 가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듯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여행은 충분히 의미가 있겠죠. 앞으로도 기회가 닿으면 열심히 돌아다닐 생각입니다. 남자들 사회생활 하는 데에서 술값만 아끼면 그것으로 경비는 충분하거든요.

그런데 여행을 다닐 때마다 이런 후회가 남습니다. 왜 좀 더 젊었던 시절에 외국에 나올 수 없었을까? 대학을 다니던 80년대 중반에만 (저는 89년 졸업생입니다) 금지되어 있던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외국에 다녀갔다면 제 인생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달라졌을 텐데. 이렇게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때 주어진 시간을 얼마나 더 밀도 있게 활용했을까? 하고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TV를 보다가 해괴한 뉴스를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방학 동안 해외연수 가는 것을 걱정하는 보도였습니다. 단기간에 영어 습득이 가능하겠는가가 기자의 지적이었죠. 물론 한 달도 채 못 되는 기간에 영어가 늘면 얼마나 늘겠습니까? 하지만 아이들이 마주할 낯선 풍경이며, 풍물들, 시민사회의 오랜 전통, 우리와 다른 삶의 색채 등등을 생각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보내야 하지 않나요.

오히려 정부가 터무니없게 거두어들이는 교육세를 이용해서 무상으로라도 내보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아이들의 삶에서 그 경험이 얼마나 커다란 자산이 될지 저는 알 것 같습니다. 제 자신이 우물안 개구리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문제는 영어만 가르치려다 해외 연수의 진정한 경험을 놓치게 되는 것이죠.

미래의 주역인 아이들에게 영어는 물론 필수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어를 사용하는 제1세계 국가들의 시민정신입니다. 자동차를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 것, 좋은 차를 탈수록 작은 차를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 자신의 수준에 맞게 소비하는 것, 소비하되 그럴 능력이 없는 약자를 잊지 않고 돕는 것, 해외 여행을 통하여 진취적인 자세로 낯선 문화를 익히는 것, 다른 민족에 대해 거부감을 갖지 않는 것 등등이 바로 시민사회의 덕목들입니다.

자존심 상하는 고백이긴 하지만 우리는 이런 부문에서 여전히 3류 국가입니다. 하지만 게처럼 옆으로 걸으면서도 자식만은 바로 걸어가길 원하는 것, 그것이 기성세대의 당연한 도리가 아닐까요? 적어도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우리의 3류의 모습만을 보여주고 1류가 되라고 말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워 보입니다.

우리는 비록 진창에 있더라도 아이들에게는 깨끗하게 닦인 길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방학 동안의 해외연수는 장려되어야 하며, 단지 좀 더 깊이 있는 문화체험이 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가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원이 없는 나라입니다. 단언하건대, 자연도 외국에 비해 특별히 아름답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인적 자원뿐입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광적으로 높은 교육열을 갖고 있습니다. 그 열정에 걸맞은 수준 높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이느냐는 별개이지만. 어쨌거나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한 투자에는 인색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제가 해외여행을 양보할 수 있는 경우란 바로 어린 아이들을 대신 보낼 수 있을 때뿐입니다. 외국을 알지 못하면서 외국과의 경쟁에서 반드시 이기라는 것은 과도한 주문이며, 또 외국인을 잘 모르면서 그 외국인을 우리나라의 관광객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것은 무모한 발상입니다.

그러니 이 긴 겨울방학에 아직 '방콕'을 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하다 못해 서점에 나가 외국 여행 안내서라도 사서 읽도록 하시죠. 외국 문화 소개서, 외국 생활 체험기, 여행기 등등 닥치는 대로 읽다보면 당신은 어느 사이 공항에서 티켓을 들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꿈을 꾸는 자에게, 그리고 준비된 자에게만 그 꿈은 현실이 됩니다.

저는 지금 '왜 일본 사람들은 스모에 열광할까'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일본에 가고 싶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제 조카들에게 보여줄 그림책을 사러갈 생각이거든요. 그 아이들이 마음껏 넓은 세계를 꿈꾸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박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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