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조선공산당 망친 신의주 청년들 ‘신영웅주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2호 26면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관련자에 대한 재판 내용을 보도한 신문 지면(동아일보, 1927년 4월 3일자). [사진가 권태균]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지 약 7개월 후인 1925년 11월 22일 밤 10시쯤. 국경도시 신의주 노송동 경성식당 2층에선 신의주의 청년 단체인 신만청년회 집행위원장 김득린(金得麟) 등 28명이 모여서 결혼식 피로연을 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1층에서는 신의주의 변호사 박유정(朴有楨)과 의사 송계하(宋啓夏)·최치호(崔致鎬)가 신의주 경찰서 순사 스즈키 도모요시(鈴木友義), 한인 순사 김운섭(金運燮)과 회식하고 있었다. 스즈키와 김운섭은 2층의 결혼식 피로연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⑨ 신의주 사건

그런데 청년회원들이 술김에 먼저 친일 변호사와 의사, 일경(日警)들에게 시비를 걸면서 ‘신의주사건’이란 대사건이 촉발되었다. 청년회원 김경서(金景瑞)가 박유정과 스즈키에게 “나의 동지 결혼식 피로연인데 축배를 받으라”고 강권하면서 시비가 붙자 2층에 있던 청년회원 10여 명이 내려와서 “순사를 때려라. 잘난 체하는 변호사, 자산가를 때려 부수라”면서 집단 구타를 했던 것이다.

스즈키는 식당 밖 일본인이 많이 사는 영정(榮町) 노무라(野村)상점으로 도주했다. 청년들이 상점 안까지 쫓아가서 스즈키를 구타하자 상점 주부는 이웃집으로 달려가서 신고했고, 일경이 달려오자 청년들은 일본어로 ‘적(敵)이 왔다’고 호응하면서 도주했다. 그 전에 집행위원장 김득린은 박유정 등을 구타하고 나서 오른쪽 팔의 붉은 완장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성공했다’고도 말했다. 신의주 경찰서 측은 붉은 완장을 가리키면서 ‘성공했다’고 말하고 경찰을 ‘적’으로 지칭한 것 등이 ‘혁명’을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치밀한 내사에 들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청년회원들은 다음날 밤 8시쯤 진사정(眞砂町) 영생루(永生樓)에 모여 ‘체면 있는 사람을 음식점에서 구타하면 체면상 고발 못한다’ ‘관권 및 자산가를 구타한 축하회를 개최하자’ 등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는데, 이것도 고스란히 일제 정보망에 들어갔다.

모스크바 공산대학. 고려공산청년회 박헌영은 이 대학 출신이었는데 청년회 결성 후 비밀리에 21명의 한인 학생을 뽑아서 유학을 보냈다.

김경서의 집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일제는 예상하지 못했던 문서들을 압수했다.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박헌영이 상해의 여운형을 통해 코민테른으로 보내는 비밀문서들이었다.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의 회원 자격 사표(査表) 및 통신문 3통’ 등의 문서들을 통해 일제는 국내에 이미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이하 고려공청)가 결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선공산당 결성 다음날인 1925년 4월 18일, 서울 훈정동 4번지 박헌영의 집에서 20여 명의 ‘주의자’가 모여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했던 것이다. 박헌영이 개회사를 하고 김단야가 낭독한 강령 및 규약을 통과시켰는데, 참석자들은 ‘동아일보’의 박헌영·임원근, ‘조선일보’의 김단야·홍증식, ‘시대일보’의 조리환(曺利煥), 노동총동맹 권오설(權五卨), 신흥청년동맹 김찬·김동명·조봉암 등과 각 지방 청년회의 대표들이었다.

그 가운데 마산 청년대표 김상주는 하루 뒤에 민중대회 개최 금지 항의시위를 주도했다가 체포되었는데, ‘신의주사건’으로 비밀결사 조직 혐의가 추가되었다. 고려공청은 조봉암·김단야·박헌영 3인을 전형위원으로 선출해 7인의 중앙집행위원과 3인의 중앙검사위원의 선임을 맡겼다. 증언이 일치하지 않지만 중앙집행위원은 책임비서 박헌영, 국제부 조봉암, 조직부 권오설, 교양부 임원근, 연락부 김단야, 그리고 김찬·홍증식 등이 선임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공청도 조선공산당처럼 화요회가 주도한 것이었다.

조선기자대회, 민중대회 등에 일경의 시선을 쏠리게 해놓고 당과 청년회를 결성했기에 조직 결성 사실을 모르고 있던 일제에 국경지방 청년들의 소영웅주의 행태가 조직의 기밀을 넘겨준 셈이었다. 박헌영은 비밀문서를 ‘조선일보’ 신의주지국 기자 임형관(林亨寬)에게 주어 상해로 보내게 했는데, 신의주의 청년운동을 주도하던 독고전·임형관은 일경의 주목을 받는 자신들보다 김경서의 집에 보관하는 것이 안전하리라고 판단했다가 거꾸로 피해를 보게 된 것이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다루었다. 일제는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자 4월에 허겁지겁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를 제정해 독립운동가들을 억압했다. 제령 7호의 제1조는 “정치 변혁을 목적으로 다수가 공동하여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방해코자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는 것이고, 제2조는 “이를 선동한 자의 죄도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령 제7호로써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는 이른바 ‘주의자’들을 처벌하기가 애매하자 1925년 5월 치안유지법을 제정한 것이었다.
치안유지법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 본토의 사회주의자들도 겨냥한 것이었다. 제1조는 “국체를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또는 그 정을 알고 이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는 것으로서 ‘사유재산제도 부인’이 추가되었다. 제2조와 제3조는 ‘이의 실행을 협의한 자나 선동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치안유지법은 일본 본토와 식민지 또는 조차지였던 조선, 대만, 화태(樺太:하얼빈), 관동주(關東州:대련), 남양제도 등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조선공산당(이하 조공)과 고려공청은 결성 직후 각각 조동호·조봉암을 코민테른과 국제공산청년회(이하 국제공청)에 보내 승인을 받으려 했다. 승인을 받을 경우 공산주의 운동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계기도 되고, 예산을 비롯해 많은 물적 지원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요회는 어떻게 국내의 최대 운동세력이었던 서울청년회를 배제한 채 조공과 고려공청을 조직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을까? 서울청년회, 곧 서울파는 화요회의 조선공산당보다 2년여 빠른 1923년 2월(일제 정보자료는 1924년 10월) 고려공산동맹(이하 공산동맹)을 결성했다. 공산동맹은 책임비서 김사국을 블라디보스토크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원동부로 보내 코민테른 국내지부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책임비서 김사국이 직접 간 것은 경성자유노동조합 사건으로 수배 중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코민테른 승인 여부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승인을 거부했다. 서울청년회는 국내 사회운동을 장악하는 세력이 국내 공산당도 조직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코민테른의 생각과 달랐다. 이 무렵 코민테른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총지휘부가 아니라 러시아 공산당의 하부기관으로 전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초기만 해도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로 사회주의 혁명이 확산되리라고 생각했다. 레닌이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 중에서 볼셰비키 노선을 지지하는 사회주의자들을 모아서 코민테른을 결성한 것 자체가 러시아 혁명을 유럽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볼셰비키들이 특히 주목한 나라는 자본주의가 발달했던 독일이었는데, 독일혁명이 지지부진하면서 러시아의 볼셰비키 사이에서 노선 투쟁이 발생했다. 크게 보아서 영구혁명론과 일국(一國)사회주의론이 대립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주장한 영구혁명은 원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50년 ‘공산주의자 동맹 중앙위원회의 동맹자에 대한 호칭’에서 사용한 용어였다.

영구혁명론의 핵심은 후진국인 러시아 일국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에 유럽 혁명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으로서 세계혁명론이라고도 한다. 이 노선에 따르면 러시아 공산당도 세계 혁명에 우선 종사해야 하기 때문에 러시아 공산당이 유럽이나 다른 국가의 공산당에 대해 우월적 지위를 주장할 수 없었다. 여기에 맞서 스탈린이 제기한 일국 사회주의론의 핵심은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이 뒤따르지 않아도 러시아 일국만으로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이 노선에 따르면 러시아 공산당은 전 세계의 모든 공산당을 지휘할 수 있고, 각국 공산주의자들 역시 러시아 혁명의 보위를 최우선의 혁명 과제로 삼아서 활동해야 했다.

1922년 5월께 레닌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에 들어가면서 스탈린의 권력이 강해지고 코민테른은 사실상 러시아 공산당의 하부조직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코민테른 지부와 각국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소련에 대한 충성이 가장 우선시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국내 최대 운동세력이라는 기반으로 코민테른의 승인을 획득하려 했던 서울청년회의 공산동맹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을 수가 없었다. 화요회가 서울청년회를 종파주의자라고 비난하는 문서를 코민테른에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김사국이 러시아 볼셰비키 지도부의 노선 변화의 의미를 정확히 간파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화요회도 일국 사회주의론이 한국의 혁명노선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화요회로서는 국내 공산주의 운동 주도권 장악에 국내의 지지보다 해외, 곧 러시아의 지지가 중요해져 자파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 이른바 국제무대에서 서울청년회는 화요회에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