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forgetto remember me 하늘로 무대 옮긴 디스코 제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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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호 04면

1979년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노래하는 ‘비지스’.왼쪽부터 모리스·로빈깁. 사진 AP=연합뉴스

1970년대 후반 전 세계에 불어닥친 디스코 음악은 원래 도시 흑인클럽에서 시작됐다. 이 참을 수 없는 흥겨움을 세계 젊은이들에게 삽시간에 감염시킨 것은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에 나타난 존 트래볼타의 춤, 그리고 ‘비지스’의 음악이었다. 당시 깁(Gibb) 삼형제의 곡 주조술과 보컬의 하모니는 경이로웠다. 언론은 그들을 “우리 시대의 비틀스”라 일컬었다. 과거 비틀스가 그랬듯 이때 비지스는 발표한 여섯 곡을 내리 전미 차트 정상에 올려놓는 가공할 히트 퍼레이드를 전개했다.

암으로 숨진 '비지스' 보컬 로빈 깁

세 멤버의 화음과 리듬감은 어떤 평론가가 표현한 대로 “같은 DNA가 아니면 도저히 구사하지 못할” 성질의 것이었다. 특히 빌보드 차트 1위곡들인 ‘Stayin’ alive’와 ‘How deep is your love’‘Too much heaven’에서 비지스는 마치 칼을 능란하게 휘두르는 검객과도 같은 변화무쌍한 보컬 하모니를 맘껏 펼치며 디스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디스코는 단조로운 반복 비트의 통조림화된 음악”이라거나 “흑인 디스코를 백인들이 강탈했다”는 세간의 비판도 그들의 빼어난 음악 앞에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핵심에 로빈 깁의 청명한 비브라토와 형 배리 깁의 가성이 있었다. 디스코 시대에는 배리 깁이 팀 내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그래도 비지스 보컬의 상징은 엄연히 로빈 깁이었다. 로빈 깁은 디스코 이전 1960년대 ‘비지스 팝 발라드 전성시대’를 견인했다. 음악 팬들은 아름답고 애절한 선율을 청명하게, 그러나 떨림이 강한 보이스 컬러로 소화해 내는 로빈 깁의 가창력에 너도나도 귀를 맡겼다. 국내 라디오를 점령한 이 무렵 ‘Don’t forget to remember’나 ‘I started a joke’ ‘Massachusetts’와 같은 잊을 수 없는 비지스의 골든 레퍼토리에서 메인 보컬을 담당한 것은 주로 로빈 깁이었다.

로빈은 보컬 주도권을 두고 경쟁을 벌였던 형 배리 깁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한때 비지스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와 홀로서기를 감행한 것도 자신이 아닌 형이 부른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내건 것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됐다. 로빈 깁은 솔로 활동을 통해서도 ‘Saved by the bell’ ‘Juliet’ 등의 주옥 같은 히트곡을 남겼다. 삼형제 중 그만이 전성기에 별도의 솔로활동을 했다는 것부터가 그가 비지스의 간판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는 2005년 비지스의 일원이 아닌 솔로로 내한공연을 갖기도 했다.

20일 런던에서 결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로빈 깁은 1960년대 발라드 시대와 70년대 디스코 시대를 거푸 정복한 인물이다. ‘발라드 귀재’ 그리고 ‘디스코 왕’. 이 점에서 그는 3일 앞서 세상을 떠난 ‘디스코의 여왕’ 도나 서머보다 이름 앞에 영예로운 수식을 하나 더 갖는 셈이다. 1948년생 도나 서머, 한 살 적은 49년생의 로빈 깁은 둘 다 12월에 태어났고 오랜 암 투병 끝에 삶을 마쳤다. 지금 기성세대의 청춘 시절을 잠식한 디스코 음악의 남녀, 그리고 흑백 대표는 이렇게 거의 동시에 퇴장했다.

음악학자 폴 감바치니는 비지스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백인 소울 보이스 중 하나”라고 했다. 로빈 깁이 ‘위대한 보컬’이라는 건 40~60대 어른들은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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