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를 다지자...형편없는 과학기자재

중앙일보

입력

우리 학생들과 화학실험 수업을 할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날림으로 만든 비커.뷰렛 등 국산 실험기구가 깨져 사고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황산을 묽게 만드는 실험을 할 때였다.

金모(17.2년)군이 진한 황산을 두께가 얇은 비커에 담아 나르다 책상 옆에 살짝 부딪쳤다. 그런데도 비커는 산산조각이 났다.

순간 진한 황산이 어디까지 튀었을지 몰라 크게 당황했다. 순도가 1백%에 가까운 진한 황산은 살이나 옷을 태울 정도의 독성 화학물질이다.

확인해 보니 황산이 金군의 양말에 몇 방울 튀긴 했지만 다행히 큰 상처를 입지 않았다. 비커뿐 아니라 뷰렛도 허술하게 만들어지긴 마찬가지다.

액체의 부피를 재는 유리관인 뷰렛의 꼭지(콕 부분 : 수도꼭지와 같은 역할)가 헐거워 그 틈새로 양잿물 등의 독성 물질이 새어나와 실험자의 손에 묻는 경우가 있다.

알고 지내는 한국화학연구원의 李모 연구원은 "물질에 열을 고루 가하려 할 때 뒤섞는 기구인 가열교반기에 화합물이 담긴 비커를 올려놓고 실험하다 낭패를 보았다. 실험 중 화합물을 약간 빨리 섞자 국산 비커가 힘없이 깨져 실험을 망쳤다" 고 말했다. 그는 그 뒤 국산 실험기구를 쓰지 않게 됐다고 귀띔했다.

유리 실험기구만 형편없는 게 아니다. 가열교반기의 기능에 이상이 생기거나 전류.전압계의 받침대 고리가 부러져 실험기기 전체를 못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삼발이나 줄칼.스탠드 등은 녹이 잘 슬어 손에 녹물이 묻기도 한다. 기구 자체뿐 아니라 실험기구의 사용 설명서도 엉성하다. 설명서만 믿고 실험을 하려 했다간 큰코 다친다.

이런 게 과학입국(科學立國)을 외치는 한국산 실험 기기의 현주소라면 우스운 일이다. 기술력이 모자라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대충대충 만들어 팔기만 하면 된다는 얄팍한 상혼이 문제다.

유리 기구에 열처리를 한번만 더하거나 두껍게 만들면 가벼운 충격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삼발이를 합금으로 만들거나 도금 처리를 하면 녹 스는 것도 쉽게 막을 수 있다.

부실한 실험기구는 부실한 교육과 연구 결과를 낳고, 실험실의 안전사고도 부른다. ''기초'' 가 없는 기초 실험기구나 만들면서 어쩌자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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