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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최원석 집 털었던 이학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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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19대 국회 ‘전과자 논란’이 뜨겁다. 그런데 논란은 대부분 종북(從北) 주사파에 관한 것이다. 특히 이석기 당선자 등 진보당 핵심 세력에게 모든 시선이 쏠려 있다. 뇌물이나 강도 같은 다른 전과(前科)는 아예 잊혀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군포에서 당선된 민주당 이학영이다.

 1970년대 후반 남민전(남조선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사회주의 혁명운동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자금 마련을 위해 재벌 집을 털기로 했다. 79년 4월, 8명이 서울 반포동에 있는 최원석 동아건설 회장 집에 들어갔다. 27세 이학영과 25세 차성환이 선두에 섰다. 차씨는 지난 4월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나와 이학영씨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경비원이 제지했다. 이씨가 경비원과 몸싸움을 벌였다. 내가 가지고 있던 과도로 경비원을 찔렀다. 현장에선 이씨만 잡혔다.” 강도 사건은 나중에 남민전 사건과 병합됐고 관련자는 징역을 살았다.

 30여 년 동안 진보·좌파 진영은 이 사건을 ‘의로운 행동’으로 묘사해 왔다. 재벌 2세들의 일탈을 응징하고 ‘민주화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얘기다. 이학영 자신도 그렇게 미화한다.

 4·11 총선 때 그는 선거공보에 조국 서울대 교수가 쓴 글을 실었다. “이학영은 강도입니다. 독재 권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되찾아오려 했던 강도입니다. 이학영은 도둑입니다. 가난하고 힘든 시민들의 마음에서 근심을 훔쳐간 도둑입니다. 피로 얼룩진 그의 민주화 투쟁에 대한민국은 민주화 유공자 자격을 수여했습니다.” ‘유공자’란 노무현 정권 때 남민전 관련자들이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된 걸 말한다.

 이학영의 홈페이지에는 다른 이가 쓴 글도 있다. “이학영·김남주·이재오가 남민전 운동을 벌였던 1970년대는 절대권력의 부도덕이 극성을 떨치던 시대였다. 권력과 재벌이 유착해 국민의 재산을 수탈하던 시기였다. (중략) 그런 시대에 담을 넘은 젊은이의 혈기를 도덕적 가치로 재단할 수 있는가. 조선시대의 임꺽정도, 장길산도, 그리고 일지매도 당시에는 한낱 도둑으로 치부됐었다.”

 1970년대 중동에 진출한 한국 건설업체들은 대표적인 애국자였다. 오일쇼크(oil shock·유가폭등)로 한국 경제가 휘청거릴 때 그들은 오일달러를 벌어들였다. 일자리도 많이 만들었다. 그때 다진 기술력으로 한국 건설은 지금 세계 최강이 되어 있다. 최원석의 동아건설도 그중 하나였다.

 ‘이학영 의적단’이 최 회장 집을 공격했던 1979년, 동아건설은 총 계약금액 20억 달러에 달하는 해외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해 한국의 수출액이 150억 달러였으니 20억 달러면 얼마나 큰돈인가. 이학영 그룹이 경비원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최 회장은 해외에 있었다. ‘사우디 통신공사 70일 비상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학영 그룹과 조국 교수, 그리고 진보·좌파에게 묻는다. 정작 ‘국민의 재산을 수탈’한 이는 누구인가. 최원석인가 이학영 일당인가. 진짜 강도는 누구인가. 중동 사막에서 삽을 들었던 건설회사인가 아니면 남의 집에서 칼을 들었던 운동가들인가. 가난한 국가에 돈을 보탠 이는 누구인가. 동아건설인가 남민전인가.

 많은 젊은이에게 세상은 부조리의 도가니다. 특히 가난한 이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이학영은 빈농의 아들이었다. 그는 세상의 모순에 분노해 공동체 혁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정확하지 못했다. 모순의 원인을 잘못 보았고 잘못된 증오로 칼을 들었다. 대의(大義)에 취해 불의(不義)의 수단에 빠진 것이다.

 북한 김일성 정권은 독재·테러 집단이었다. 남한에 문제가 있다고 그런 거악(巨惡)을 추종하는 건 정의가 아니다. 부(富)를 누린다고 재벌을 거악으로 오인(誤認)한 것도 정의가 아니다. 그런데도 노무현 정권 시절 모든 게 뒤집어졌다. 이학영과 남민전은 민주화 유공자로 보상금을 받았다. 그들이 국가유공자면 그들의 공격을 받았던 최원석은 무엇인가. 국가위해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