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명예의 전당 (21) - 조지 시슬러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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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 오리올스는 과연 '명문 팀'인가? 다소 엉뚱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질문에 대해 팬들이 내놓을 답은 대체로 긍정적일지도 모른다.

짐 파머와 브룩스 로빈슨, 프랭크 로빈슨과 에디 머리 등의 대스타들이 거쳐갔고 캘 립켄 주니어라는 거인이 버티고 있는 팀, 그리고 20세기 후반기에만 6번이나 리그 정상에 오르고 3번은 월드 시리즈까지 제패한 팀이 바로 오리올스가 아니던가.

팬들은 얼 위버 감독 시절의 화려한 투수진, 그리고 1970년 월드 시리즈에서 브룩스 로빈슨이 보여 준 환상적인 수비와 립켄의 2,632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쉽게 떠올린다.

그러나, 팬들이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볼티모어 시절의 역사뿐이다. 20세기 전반기의 오리올스를 기억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리올스가 볼티모어를 연고지로 삼은 것은 1954년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이 팀은 세인트루이스에 연고를 둔 '브라운스'였다. 그리고 이 브라운스의 성적을 살펴보면, 오리올스가 '명문'이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팀인지에 대해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다.

브라운스는 세인트루이스에서 52년을 보내는 동안 최하위를 11번, 7위(1960년까지 아메리칸 리그에는 8팀만이 있었다)를 14번 차지하였다. 브라운스가 리그에서 4위 안에 랭크된 적은 단 12번이었으며, 리그를 제패한 해는 1944년뿐이다. 물론 월드 시리즈 우승 경력은 없다.

한때 세인트루이스가 뉴욕이나 시카고 등과 마찬가지로 복수의 팀을 거느렸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팬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브라운스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진 존재이다. 그리고 브라운스의 선수들도 마찬가지이다.

브라운스를 실제로 유명하게 했던 선수들은, 대스타들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이유로 유명해진 인물들인지도 모른다. 외팔의 외야수 피트 그레이나 빌 빅의 일회성 이벤트에 기용되었던 '출루율 10할'의 난쟁이 에디 게이들 등이 그들이다.

그렇다면 브라운스는 위대한 선수를 배출한 적이 전혀 없었는가? 미주리 주 최초의 아메리칸 리그 팀의 역사를 대표할 인물은 고작해야 바비 월러스나 잠시 몸담았던 구스 가즐린 정도뿐이었는가?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조지 시슬러가 있었기 때문이다.

팬들이 그에게 붙인 별명은 'Georgeous George'였다. '화려하다'라는 뜻의 'Gorgeous'와 그의 이름을 결합시킨 단어야말로 그를 가장 잘 수식해 주는 형용사였다.

타이 캅은 시슬러를 '완벽한 선수에 가장 가까운 존재'로 표현한 바 있다. 프랭키 프리시는 아예 그를 '완벽한 선수'로 불렀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트리스 스피커나 에디 칼린스에게도 그와 같은 칭호를 부여한 적이 없었다.

시슬러의 타력과 수비력, 베이스러닝 능력은 그만큼 놀라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비록 로저스 혼즈비가 1952년에 루 게릭를 제쳐 놓고 그를 역대 최고의 1루수로 꼽은 것은 옳지 않았다 해도, 그가 데드 볼 시대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완벽히 갖춘 선수 중 하나였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시슬러는 잘 알려진 대로 한 시즌 최다 안타 기록(257개)의 보유자이며, 두 번 이상 4할 타자가 된 단 3명의 선수 중 하나이다. 그가 1922년에 기록한 .420보다 높은 시즌 타율을 올린 적이 있는 선수는 20세기만을 놓고 볼 때 혼즈비와 너폴리언 래셔웨이뿐이다.

더구나 그는 일반적인 1루수들과는 수비력이라는 면에서 차원이 달랐다. 그는 유격수에게서도 기대하기 힘든 경이적인 수비 장면을 자주 연출하였다. 만약 그의 시대에 골든 글러브가 존재하였다면, 가장 '황금장갑'을 많이 낀 1루수는 키스 에르난데스가 아니라 시슬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선수 생활 초기에, 그의 놀라운 수비력을 보여 주는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브라운스는 보스턴에서 어웨이 경기를 치르고 있었고, 레드 삭스는 무사 1-3루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이 때 타자는 좌익수 앞으로 깊숙한 플라이를 날렸고, 좌익수는 홈을 포기하고 1루의 시슬러에게 송구하였다. 시슬러는 1루로 귀루하던 주자를 아웃시켜 더블 플레이를 성공시킨 뒤, 즉각 홈으로 송구하여 3루 주자까지 아웃시켰다.

또한, 그의 주루 플레이 능력 역시 그를 대스타로 자리매김하게 한 요인 중 하나였다. 그는 캅과 칼린스 등의 어깨를 나란히 했던 대도(大盜)로, 도루 타이틀을 4번 차지하였으며 1922년에는 51 도루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떤 면에서는 불운한 인물이었다. 그는 선수로 활동하던 기간 내내 캅이나 베이브 루스 등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고, 1923년부터 시력 이상으로 부진에 빠지는 바람에 3000안타 클럽의 멤버가 되지 못했다.

칼린스는 그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였다. "그에게는 캅이나 루스의 화려함이 없었다. 그는 선수로서는 매우 탁월했지만, 지나치게 과묵하고 흠잡을 데가 없는 성품 때문에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시슬러는 루스나 스탠 뮤지얼 등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좌완 투수로 활약하였다. 그는 1911년에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리그의 애크런 팀과 입단 계약을 맺었으나, 사실 이 때 그는 18세로 부모의 동의 없이 계약을 맺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의 부모는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고, 시슬러는 애크런에서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시슬러는 고등학교 시절 자신과 배터리를 이루었던 러스 베이어가 미시건대학교로 진학한다는 것을 알고, 그를 따라 프로 팀 대신 대학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대학 신입생 시절, 그는 훗날 야구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인 학교 야구팀의 코치 브랜치 리키를 만나게 되었다. 메이저 리그에서 포수로 뛴 경력이 있는 리키는 좌완 투수 시슬러의 재능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리키는 시슬러를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회상하였다. "나는 학교를 대표할 팀을 구성하기 위해 미시건 데일리(학교 신문)에 광고를 냈다. 그리고 몰려온 지원자들과 면접을 하던 중, 한 미소년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의 키는 5피트 9인치, 체중은 160파운드 정도였고 몸매는 다부진 근육질이었다. 푸른 스웨터를 입고 오른손에 글러브를 낀 그는, 자신을 공학을 전공하는 신입생 조지 시슬러라고 소개했다."

그의 회상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내가 신입생을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고 밝히자 그는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팀 주장인 노먼 힐이 '저 아이만큼은 좀더 살펴봐야 한다'라고 주장하였고, 시슬러는 베이어와 배터리를 이루어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투구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볼 스피드와 컨트롤 능력은 거의 타자의 공략을 불가능하게 했다."

시슬러는 신입생이던 해에 투수로서 57이닝 동안 84탈삼진을, 타자로서 104타수 46안타를 기록하여 자신의 재능을 입증했다. 그리고 1914년에는 주장을 맡아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대학에서 통산 13승 3패와 타율 .404라는 빛나는 성적표를 손에 쥐었다.

그러나 애크런 팀이 시슬러와 맺은 계약에 관한 권리는 컬럼버스 팀을 거쳐 빅 리그의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로 넘어간 상태였다. 그리고 파이어리츠의 구단주 바니 드라이푸스는, 계약에 따라 시슬러가 대학을 떠나 파이어리츠에 입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키는 시슬러에게 그 계약은 구속력이 없으므로 계속 대학에서 활동하라고 설득하였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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