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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난지공원의 특별한 어린이날 심지 굳게 지켜온 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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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1994년 초여름쯤이었을 게다. 남편 친구가 서울 가양동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좀 부러웠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한강변의 고층 아파트. 당시 우리는 경기도 부천 소형 아파트에 세를 살고 있었다. 밖은 빙 둘러 논이었다. 서울 출퇴근이 만만찮았다. 어쨌거나 주스통 사들고 찾은 신혼집은 생각만큼 훌륭하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놓기 힘들다고 했다. 강 건너에 난지도가 있었다. 77년부터 서울의 쓰레기 매립지로 쓰이다 그 얼마 전에야 폐쇄된 터였다.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은 없구나, 속으로 씩 웃었다.

 그 후 20년 어름이 다 돼서야 그 난지도란 곳에 처음 가봤다. 이틀 전 어린이날이었다. 옛 쓰레기장의 흔적은 눈 씻고 봐도 없었다. 난지한강공원. 사단법인 한국이주민건강협회(건강협)의 ‘제10회 희망의 친구들 무지개 축제’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 여기 온 건 모 선배 때문이었다. “실제 다문화가정 아이들 왕창 본 적 있어?” 서울 특정 지역에서만 꼼지락거리며 사는 내가 어디서, 그것도 ‘왕창’ 그 친구들을 보겠나. 선배는 마침 이런저런 행사가 있으니 놀 겸 봉사도 할 겸 한번 가보라 했다. 정말 생김도 피부색도 다른 아이들 400~500명이 신나게 뛰놀고 있었다. 부모들은 차양 아래서 느긋한 시간을 즐겼다. 봉사활동은 함께 간 아들에게 맡기고 사람들을 만나러 갔다. 이 행사를, 빛 안 나는 이주민 건강 지킴이 활동을 지속 가능하게 해준 특별한 사람들이다.

 이왕준 관동의대 명지병원 이사장은 건강협의 설립 멤버이자 현 부회장이다. 레지던트 시절이던 90년대 중반부터 조직적인 이주민 의료지원 활동을 펴왔다. 그새 대형병원을 4개나 운영하는 ‘부자’가 됐지만 생각과 태도엔 변함이 없다. 그는 “돈 보시가 가장 쉽고 몸 쓰는 게 그 다음, 정신적 보시가 가장 어렵다”고 했다. 그 3보시를 20년째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행사와 단체 운영의 최대 ‘물주’는 현대·기아차그룹이다. 매년 2억5000만~2억7000만원을 무려 9년째 지원하고 있다. 기업 입장에선 후원처를 자주 바꾸는 게 생색내기 좋다. 건강협의 김정우 팀장은 “현대차가 그런 유혹을 떨치고 뚝심 있는 지원을 해준 덕분에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렇게 말하는 김 팀장만 해도 6년 전부터 이 행사를 도맡아 꾸려왔다.

 18년 전 강 건너편까지 악취를 날리던 난지도가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 건 놀라운 생태복원력 덕분이라고 한다. 이를 뒷받침한 것이 10여 년간 계속된 정부와 서울시의 재건 노력이었다. 국내에 다국적 이주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지 벌써 20년이다. 1.5세대를 지나 2세대가 등장하고 있다. 적절한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이들 역시 타고난 생명력으로 우리 사회를 한층 풍요롭게 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지속적인, 심지 굳은 노력이다.

이나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