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난 오자와, 몰락한 ‘오야지’ 다나카 뛰어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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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 2004년 8월 노무현 정권의 핵심 인사 A씨가 일본을 찾았다. 당시 일본 민주당 부대표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를 만난 A씨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어째서 당신은 만년 ‘어둠의 장군’입니까.”

 화려하게 각광받는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늘 ‘영원한 2인자’에 머물고 있는 오자와를 다소 비꼰 질문이었다. 이 말을 듣자 오자와는 불끈했다. 당초 30분으로 예정됐던 면담은 10분 만에 끝나고 말았다. A씨가 방을 나가자마자 오자와는 비서에게 이렇게 고함쳤다. “앞으로 한국 정치인들과의 만남 다 끊어!” 실제 이 사건 이후 오자와는 1년 넘게 한국 정치인들을 만나지 않았다.

#2. 2009년 12월. 그해 9월 총선에서 자민당을 꺾고 55년 만의 정권교체를 일궈낸 오자와는 당을 장악하는 간사장으로 있었다. 국회의원 143명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하는 일정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오자와는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143명 전원과 악수하고 기념 촬영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은 난색을 표했다. “그렇게 하면 시간이 너무 걸린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오자와는 “가지 않겠다”며 버텼다. 결국 후 주석은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143명의 민주당 국회의원 전원과 일일이 악수하고 사진 촬영에도 응했다. 오자와의 뚝심이 관철된 것이다. 오자와를 수행한 의원들은 대부분 초선이었다. 이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확실한 ‘오자와파’가 됐다.

 두 에피소드는 오자와의 정치 스타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좋고 싫은 게 확실하다. 일단 결정을 내리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그래서 리더십과 강단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이는 바꿔 말하면 타협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기존 질서를 용납하지 않는다. 적(敵)을 품지 않는다. 적은 그저 적일 뿐이다.

‘오자와 재판’은 검찰 반란과 언론의 합작품

 오자와는 지난달 26일 정치자금법 관련 제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원자격 정지라는 족쇄도 곧 풀릴 전망이다. 복권이 된 것이다.

 이번 재판은 그에게는 정치인생을 건 한판 승부였다. 유죄가 되면 정치인생은 사실상 끝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재판이 오자와에게 중요했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를 정계에 입문시키고 사실상 키워준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의 벽을 넘어서느냐 아니면 똑같은 전철을 밟느냐 하는 것이었다.

 오자와는 다나카 전 총리를 ‘오야지’라고 부른다. ‘아버지’를 격의 없이 부를 때 쓰는 표현이다. 다나카는 1970년대 말 불거진 록히드 정치자금 사건으로 1심과 2심에서 모두 유죄를 선고받은 뒤 마지막 재판이 진행 중이던 93년 숨지고 말았다. 당시 오자와는 7년간에 걸친 1심 과정에서 191차례의 공판을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지켜봤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떻게 몰락하는가를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본 것이다. 그런 오자와에게 다나카와 마찬가지 정치자금법으로 유죄 판결을 받는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똑같은 몰락의 길을 간다는 것은 자신을 키워 준 다나카에 대한 배신이었다. 또 늘 “오야지(다나카)를 넘어서는 정치인이 되고 말 것”이라고 다짐해 왔던 오자와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번 재판은 엄밀한 의미에서 ‘인민재판’이었다.

 그 경과를 돌이켜보자. 먼저 검찰이 칼을 겨눈 것은 오자와의 비서들이었다. 회계 부정 혐의로 비서 3명이 구속됐다. 오자와의 정치자금 관리단체인 리쿠잔카이(陸山會)가 2004년 도쿄시내 택지(3억5200만 엔)를 구입할 때 들어간 돈의 출처를 제대로 기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택지 구입 비용 4억 엔이 어디서 흘러 들어왔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오자와 측은 “개인 돈”이라고 주장했지만 검찰은 “오자와가 청탁의 대가로 받은 돈이 분명하다”며 관련자들을 줄줄이 소환했다. 도호쿠(東北) 지방 이와테(岩手) 현 출신인 오자와가 이 지역의 건설공사 수주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첩보에 따라 거기서 공사를 따낸 건설업체 사장들을 죄다 불러들였다. 검찰은 그 과정에서 오자와에게 비우호적인 언론에 수사 내용을 슬쩍 흘리는 작전도 구사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오자와가 비서와 정치자금 수지보고서를 허위 기재하기로 공모했다는 증거도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검찰 수뇌부는 오자와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검찰 수사팀은 수뇌부의 이 같은 결정에 반기를 들었다. “100% 확실하게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는 한 기소는 안 된다”는 수뇌부의 방침에 맞서 수사팀은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검찰심사회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심사회는 검찰이 불기소한 사안에 대해서도 여러 자료나 정황으로 볼 때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기소할 수 있다. 이 제도는 2009년 도입됐다. 검찰심사회가 강제기소 방침을 결정한 2010년 10월 4일. 오자와는 도쿄 모토아카사카(元赤坂) 개인 사무실로 측근 의원들을 불러 모았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한 인사는 “오자와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이건 권력투쟁이다’라고 말하더니 돌연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이 자리에서 오자와는 “이 재판을 반드시 승리한 뒤 내 40년 정치인생을 마무리 짓는 마지막 도전에 나서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오자와에 대한 호불호는 엇갈리지만 일본 정치권에서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은 바로 그가 ‘마지막 거물 정치인’이란 점이다. 정치 경륜이나 큰 판을 짜는 능력이란 점에서 14선 의원인 그보다 뛰어난 정치인을 찾아보긴 쉽지 않다.

오자와 일본 민주당 전 대표의 정치적 아버지인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 [중앙포토]

 오자와는 27세 때인 1969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됐다. 89년 47세의 젊은 나이에 집권 자민당의 간사장에 취임하면서 일본 정치의 핵으로 떠올랐다. 무소불위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91년 10월의 일이다. 물러난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 총리의 후임을 뽑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를 비롯한 세 명의 정치인이 출마했다. 유세장을 누벼야 할 후보자들이 어느 날 한 정치인의 개인 사무실로 줄줄이 불려갔다. 오자와의 ‘면접 심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72세의 미야자와는 아들뻘인 49세 오자와의 면접 시험을 통과하고 나서야 총리직에 오를 수 있었다. 오자와는 직접 총리로 나서진 않았다. “너무 젊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는 50대 총리도 젊다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오자와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총리가 될 수 있다고 누구나 생각했다.

이후 93년 자민당을 뛰쳐나온 뒤로는 분당·합당·창당 등 정계 개편을 줄곧 주도했다. 2009년에는 총선거를 눈앞에 두고 당 대표 직에서 물러났다. 이번에 무죄 판결이 내려진 정치자금 스캔들이 불거지며 여론이 나빠지자 “당의 정권교체를 위해 ‘개인 오자와’를 희생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몇 달만 버텼으면 40년 정치인생의 집대성인 총리직을 거머쥘 수 있었는데 말이다.

마지막 승부에 나설까

 그는 큰 승부에 나설 때 먼저 운을 띄운다. 하나의 테마를 잡는다. 2006년 4월 민주당 대표 경선에서 간 나오토(菅直人)와 대결할 때는 ‘변화’를 키워드로 삼았다. 자신을 ‘구태 정치인’이라 공격하는 이들을 향해 먼저 선공하고 나선 것이다. 연설에선 이탈리아 영화 ‘들고양이’의 명대사를 인용했다. “내가 계속해서 살아남으려면 우선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버트 랭커스터의 명대사는 당심을 흔들었고 결국 그는 승리했다. 처음으로 총리직에 도전했던 2010년 9월의 당 대표 선거에선 ‘꿈’을 내걸었다. 그는 마틴 루서 킹의 명연설을 꺼내 들며 “내겐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을 이루게 해주세요”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 꿈은 정치자금 의혹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오자와는 무죄 판결이 내려진 뒤 오는 9월의 당 대표 선거를 향해 마지막 승부수를 구상 중이다. 이미 “일본에 활력을 가져와야 한다” “(국가에) 마지막 봉사를 하고 싶다”며 운을 띄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의 적은 ‘부정적 여론’이다. 아직도 여론조사를 하면 그를 지지하는 여론은 20%가 채 안 된다. ‘부패한 옛날 정치인’이란 여론을 돌려놓지 못하면 오자와의 꿈은 말 그대로 꿈으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예전에는 “늘 흠만 잡으려 한다”며 거들떠보지 않았던 아사히(朝日) 등 주요 신문들과도 적극적으로 만나는 등 변신을 시도하고 있어 주목된다.

 최근 들어 부쩍 거론되기 시작한 부인 가즈코 여사와의 별거설 등 사생활과 관련된 스캔들, 그리고 오랜 세월 그를 괴롭혀 온 건강 이상설도 오자와가 극복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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