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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치위스키·골프 공통점은 … 한때 ‘금지된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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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면

골프와 위스키는 음지에서 자랐다. 초기 위스키는 숙성시키지도 않은 무색의 거칠고 독한 토속주였다. 18세기 중반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점령하면서 위스키는 수난을 당했다.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좋아하는 위스키에 혹독한 세금을 매겼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세리를 피해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비밀리에 위스키를 생산했다. 당시 밀주를 생산하던 곳은 현재 발렌타인의 증류소인 글렌 버기가 있는 스페이사이드가 대표적이었다. 산이 깊고 물이 맑으며 보리가 풍부한 곳이다. 현재 스페이사이드는 스카치 위스키의 메카가 됐다.

올해로 건립 200년을 맞는 발렌타인의 증류소글렌 버기. 스코틀랜드 최고의 위스키가 생산되는 곳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밀주가 되면서 스카치 위스키는 다른 술이 범접할 수 없는 맛을 만들어 내게 됐다. 관리의 눈을 피하기 위해 낮에 위스키의 원료인 보리를 햇빛에 건조시킬 수 없었던 양조업자들은 밤에 불을 때서 맥아를 말려야 했다. 달빛 아래 밤에 작업하던 밀주 생산업자들을 ‘Moon Shiner’, 밀주를 ‘Moon Shine’이라고 부른다. 밤에 불을 때서 말린 맥아에서는 이전 위스키에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향기가 났다.

밀주는 유통이 쉽지 않다. 오래 보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오크통은 비쌌다. 스카치 위스키는 외국에서 한 번 사용한 오크통을 재활용해 쓰게 됐다. 무색이었던 위스키는 버번이나 셰리 와인을 넣었던 통에서 오랜 기간 숙성되면서 색이 아름다워지고 맛과 향이 깊어졌다.

골프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초창기 골프가 생긴 곳은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네덜란드로 알려졌다. 네덜란드와 양털 교역을 하던 스코틀랜드 동해안의 여러 도시에 동시다발적으로 골프가 생겼다는 것이 그 증거다. 당시 골프는 그냥 막대기로 돌을 때려서 일정한 곳에 보내는 조악한 놀이였다. 스코틀랜드와 네덜란드 모두 중독성이 강한 이 놀이를 전쟁 준비 등에 방해된다며 금지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법을 잘 지켰다. 네덜란드에서 골프는 사라졌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무시했다. 몰래 골프를 쳤다. 그러면서 장비를 발전시켰으며 규칙을 만들어내고 멋진 클럽을 구성했다. 그리고 골프의 고향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골프와 위스키는 흡사한 점이 매우 많다. 위스키와 골프는 모두 스코틀랜드의 상징이다. 스코틀랜드의 대표상품으로 인접한 잉글랜드 사람들까지 사로잡았다. 19세기 말엔 대영제국의 깃발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둘은 한 세트로 움직였다. 전 세계 골프 클럽에선 라운드 후 위스키를 마시는 것이 풍습이 됐다. 한국엔 성적인 의미로 잘못 알려졌지만 이른바 ‘19번 홀’은 라운드 후 위스키나 맥주, 와인을 마시는 것이다.

위스키와 골프 모두 남성성이 강하다. 골프룰을 관장하는 세인트앤드루스의 R&A와 뮤어필드 등 고루한 클럽하우스엔 “여자와 개는 출입 금지”라는 푯말이 아직도 있다. 마스터스를 여는 오거스타 내셔널 클럽도 여성을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는데 버티고 있다. 영국의 평범한 클럽에서도 클럽하우스 바에 여자가 들어오는 것은 터부시되는 분위기가 있다.

골프와 위스키는 향유층이 비슷하다. 고학력의 중산층이 위스키와 골프를 즐긴다. 그래서 위스키 회사들이 골프 마케팅에 에너지를 쏟는다. 발렌타인이 골프 마케팅의 선구자다. 1960년부터 골프 대회를 후원했고 현재에도 골프에서 가장 강력한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발렌타인 존 레인 마케팅본부장은 “한국은 발렌타인의 중요한 시장이기도 하지만 골프에 가장 열정적인 나라여서 한국에서 발렌타인 챔피언십을 연다”면서 “아시아 최고 대회로 키우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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