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비디오 화제작] 보일러 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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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지독한 부자'(fucking millionaire)가 되기를 꿈꾸지만 사실 그런 '꿈'을 입 밖에 내려고 하진 않는다. 그렇게 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도 하려니와 행복은 금전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아니 때론 반비례하기까지 한다는, 성인들의 금언에 위무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다면 이 남자를 한 번 보라. 아주 자신 있게 이렇게 소리치는 그를. "돈으로 행복을 살 순 없다고 말들을 하는가? 그렇다면 내 얼굴의 미소를 보라." 벤 애플렉이 연기하는 이 남자 짐이 하는 말들 속에는 견고한 확신감과 미묘한 견인력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럴진대 3년안에 백만장자로 만들어주겠다는 그의 권유를 어떻게 뿌리칠 수 있겠는가. '보일러 룸'(Boiler Room)은 바로 그처럼 돈을 쥐어주겠다고 꼬드기는 세상, 하지만 그러려면 무언가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세상, 자본주의 세계의 원초적 생리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19살의 한 청년을 그 정글과도 같은 세상 속에 던져 넣으면서 전개된다. 부모 모르게 대학을 자퇴한 세스(지오바니 리비시)는 자신의 아파트에 불법 카지노를 운영하면서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린다. 이 사실을 안 판사인 그의 아버지(론 리프킨)는 세스를 호되게 꾸짖는다. 다소 위축되긴 했지만 여전히 성공에의 꿈을 접지 않고 있는 세스에게 일종의 전기(轉機)가 찾아온다. 젊은 나이에 페라리를 몰고 다닐 정도로 성공한 그렉(니키 캣)을 따라 세스는 그렉이 있는 J. T. 말린이라는 증권 회사에 발을 디디게 된 것. 이른 성공을 약속하는 이 회사에서 세스는 자신의 야심을 펼쳐나가려 한다. 그게 아버지로부터 애정과 신뢰를 다시 얻어낼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던 중 세스는 다른 회사들보다도 유난히 커미션을 많이 주는 이 회사의 흑막을 알게 된다.

영화의 제목인 '보일러 룸'은 증권 사기를 하는 일군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 그렇듯 영화 ‘보일러 룸’은 '증권이라는 마약을 파는 브로커들'의 세계로 파고든다. 영화의 메가폰을 잡았고 또한 시나리오도 쓴 27살의 젊은 감독 벤 영거는 아주 재치 있게도 그 세계를 말 그대로 마약 밀매를 하는 갱스터의 세계처럼 묘사한다.

J. T. 말린이란 회사에 소속된 '갱스터'들은 영화 ‘월 스트리트’(올리버 스톤, 1987)를 보면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악랄한 브로커 게코(마이클 더글라스)의 대사를 마치 자신들의 교리인양 외는가 하면, '계집들과는 얘기하지 말라'는 계율을 신봉하는 철저한 마초(macho)들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들은 술집에서 다른 증권 회사에 소속된 사람들과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그들의 공격적 성향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전화기 너머로 잠재 고객에게 어떤 수를 써서든 주식을 팔고자 기를 쓰는 그들은, 그러니까 매일매일 수천 번씩 고객과의 '전투'를 수행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이들 아닌가. 영화는 이 '갱스터'들의 세계 위에 마음을 흥분시키는 힙합 음악을 깔아놓음으로써 보는 이의 심장 박동을 한층 높여 놓는다.

다양한 캐릭터들과 그들이 위치한 세계에 대한 생생한 묘사, 주요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덕에 '보일러 룸'은 꽤 에너제틱한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그 활기가 폐부 깊숙이 찔러올 만할 정도의 것은 되지 못한다.

이를테면, 진실을 발견하고서 궁지에 빠진 세스가 도주를 감행하는 마지막 부분 같은 경우, 그의 절박한 심리에 맞춰 스피디하게 전개되지만, 그 다급한 발걸음을 내딛는 사이에 그만 드라마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스와 그의 여자 친구 애비(니아 롱), FBI 사이의 '거래'관계가 다소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거 감독이 끝까지 이 사회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을 유지한다는 점은 꽤나 매력적이다. 세스가 도주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따지고 보면 FBI와의 '거래' 때문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아스팔트 정글'을 빠져나온 그는 기껏해야 이런 식으로 말할 뿐이다. "내가 농구를 잘 할만한 능력은 없으니 이젠 마약이나 팔아야겠다."

원제 Boiler Room, 2000년, 감독·각본: 벤 영거, 출연: 지오바니 리비시, 론 리프킨, 니아 롱, 스타맥스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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