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가서스 10000마일
이영준 지음, 워크룸
319쪽, 2만원
저자 이영준(51·계원조형예술대 교수)은 자칭 기계만 보면 맥박이 뛰는 사나이다. 기계를 보는 순간 관련 정보와 역사적 상상력으로 머리가 꽉 차는 왕괴짜다. 그래서 본업인 사진평론과 별도로 6년 전 『기계비평: 한 인문학자의 기계문명 산책』을 펴냈다.
기계비평? 어디 문학비평, 미술비평만 하란 법이 있나? 미학·미술사를 전공한 그가 보기에 기계는 인간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매혹의 텍스트다. 즉 대형 수송수단인 KTX· 항공기란 심미학의 대상이기도 한데, 이번에 그가 사고를 쳤다. 오랜 로망인 363m짜리 대형 컨테이너선에 작심한 채 올라탔다.
여의도 63빌딩보다 100m나 더 큰 배 이름은 CMA CGM 페가서스. 신화에서는 날개 달린 흰 말이지만, 바다에서는 글로벌 해운업의 상징이다. 저자는 지난해 초 배를 타고 한 달간 1만 마일을 함께 움직였다. 중국 상하이에서 인도양~홍해를 거쳐 영국 사우샘프턴까지…. 그럼 대형 컨테이너선 승선 기록 아닐까. 그 이상이다. 도처에 통찰이 빛난다. “철의 풍경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미켈란젤로의 조각, 인상파 회화 등과는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이다. 철 특유의 재질, 존재감이 안복(眼福)을 가져다 준다.”(63쪽) 그 동안 예술비평에 등장했던 어휘-심미안 등이 동원되는데, 그게 의외로 어울린다.
이를테면 페가서스를 움직이는 엔진은 높이 12m 길이 25m. 즉 아파트 8층 높이인데, 가히 괴물이다. 찐득찐득한 벙커C유라는 피로 움직이는 이 심장이 울리면 배 전체에 소리와 진동이 전해진다. 그걸 이영준은 “위풍당당한 숭고미” “초현실적일 정도로 강력한 아름다움”이라고 거듭 찬탄한다.
여기서 작은 반전. 페가서스는 프랑스 해운회사 소속이지만, 울산의 현대중공업에서 2009년 만들어졌다. 배 만드는 1등 나라 한국에 대한 자부심이 곳곳에 스며있다. 저자의 말대로 된장찌개에 밥 먹는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초대형 배들이 오대양을 주름잡는 게 생각만 해도 자랑스럽다.
이 책은 세상의 모든 인공(人工)과 기술에 대한 인문적 헌사(獻辭)다. 단 전부 만족스러운 건 아니다. 미학적 찬탄에 곁들여 철학이 있어야 했는데, 그게 2% 부족하다. 테크놀로지의 미래를 담은 과학철학서인 케빈 켈리의 『기술의 충격』이 보여준 기술-기계-인공지능에 대한 비전이 아쉽다.
저자가 배를 탈 때 들고 갔던 책인 『대항해 시대』(주경철) 이후 펼쳐진 역사를 좀 더 맛깔스럽게 집어넣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기계비평이란 새 영역을 개척한 공로는 온전히 이영준의 것이다. 서점가에 이런 괴물 같은 책도 있어야 정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