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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수원 살인 녹취록 차마 못 읽었다 … 세월 흘러도 생생한 공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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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한참 전 일이다. 회사 복도에서 남자 선배와 마주쳤다. 잠시 일 얘기를 나눴다. 선배가 내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급하다. 볼일 보면서 얘기하자.” 엉겁결에 남자화장실 쪽으로 발을 옮기는데 선배가 우뚝 섰다. “아 참, 너 여자지!”

 이런 얘길 하는 선배도 있었다. “세상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 남자, 여자, 여기자.” 근데 그 ‘여기자’의 표본 격이 나라는 거였다.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상하지도 않았다. 외려 남자 동료들이 ‘여자임을 잊을 수 있게’ 처신한 점에 뿌듯함을 느꼈다. 요즘도 간혹 말 같잖은 성적 농담을 하는 남성들이 있다. 때론 웃어주고 때론 못 들은 척하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배로 갚아준다. 그렇게 나름대로 ‘한국에서 여자로 사는 것’에 닳고 닳았다는 나도 요 한두 달은 견디기 힘들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몹시 상처 받았다.

 첫 타격은 ‘나꼼수 막말 사건’이었다. 여성 팬의 이른바 ‘비키니 인증 샷’에 대한 멤버들의 반응도 실망스러웠지만 더 속상한 건 그 추종자들의 살기 어린 언어 폭력이었다. 진보 세력 내의 비판마저 ‘못생긴 오크X들의 열폭’이라 몰아붙였다. 총선 레이스 중엔 김용민 민주통합당 후보의 옛 발언이 문제가 됐다.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에게 성폭행 후 살해라는 ‘개그’를 던졌다. 선거 전 막바지에는 김형태 새누리당 후보의 제수(동생의 아내) 성폭행 미수 의혹이 터졌다. 공개된 녹취록에는 김 후보로 추정되는 남성의 “남녀 관계까지는 안 갔다, 죽을 죄를 지었다”는 발언이 담겨 있다. 성폭행이 뭘로 봐서 ‘관계’인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7일 발생한 수원 20대 여성 살해 사건이었다. 신문에 난 피해자와 112 대원 간 대화 녹취록을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그 절박한 상황이 이처럼 ‘태평한’ 방식으로 재연된 자체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부 언론의 보도 행태에도 욕지기가 일었다. 제목에 굳이 ‘토막 살인’이란 표현을 넣고 피해자의 시신 상태를 그토록 적나라하게 묘사해야 했나.

연원이 있다. 7세 때 노숙자인 듯한 남성에게 머리채를 잡혀 한참 끌려간 적이 있다. 마침 지나가던 이웃 아주머니가 아니었다면 어찌 됐을지 모른다. 열두 살 때는 동네 친구가 부랑자에게 폭행당하는 참극이 있었다. 여중 시절엔 속옷 끈을 아무렇지 않게 잡아당기는 체육교사로 인해 친구들과 분루를 삼켰다. 그러니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여자들은 진정 남의 일이 아닌 거다. 살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 그것은 공포, 맨살 위로 독사가 지나가듯 생생한 공포.

 성폭력은 영혼의 살해다. 말로든 행동으로든, 법으로나 관행으로나 이를 가벼이 여기는 사회는 인권을 말할 자격이 없다. 아버지가 딸을, 교사가 학생을, 성직자가 신도를 성폭행해도 정상 참작과 집행 유예가 빈번한 나라. 새로 금배지 단 300명, 그들에겐 국민 절반의 원초적 공포를 덜어줄 책임이 있다.

이나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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