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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경제] 파워 중견기업인 … 크로커다일 신화, 최병오 형지그룹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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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울 역삼동의 패션그룹 형지 지하 1층 강당. 60년 인생 중 반을 의류업으로 보낸 최병오 회장이 마네킹 사이에 앉았다. 직원 교육을 위해 만든 이곳은 최 회장이 건물에서 가장 아끼는 공간이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 등 각계 명사를 초청해 경영과 삶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 “평생 배워야 한다”는 최 회장의 소신 때문이다. [김성룡 기자]

가난에 화가 나 싸움만 하고 다녔던 부산 소년. 지금은 한 해 매출 7000억원에 1500만 장씩 의류를 생산하는 기업의 오너. ‘크로커다일 레이디’ ‘샤트렌’ ‘올리비아 하슬러’를 비롯한 8개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패션그룹 형지의 최병오(60) 회장이다. 그는 “돈에 고통을 하도 많이 당해 돈에 한이 맺혔다”고 말했다. 그 한은 지금도 오전 4시면 일어나 일터로 나가게 하는 힘이 됐다. 집념·끈기는 부산을 거쳐 서울 동대문에서 단단해졌고 역삼동에 자리를 잡았다.

#부산 하단동

 어렸을 적 그의 집은 동네에서 셋째 부자였다. 최고 부잣집은 어망 만드는 집, 그 다음은 벽돌 만들며 술 빚는 집, 그리고 그의 집이었다. 그의 선친은 건설 재료인 석회가루 공장을 운영하면서 무역사업을 했다. 부산에서 여수로 연탄을 싣고 가 굴 껍데기를 가지고 돌아와 팔았다. 최 회장의 기억 속엔 만국기를 달고 바다를 가르던 아버지의 배, 직원들이 북적이던 공장이 남아 있다. 중학교 1학년, 아버지가 간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시기 전까지의 일이다.

 살림은 빠르게 기울었다. “어머니가 재산을 관리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재산이 빨리 없어졌습니다. 여섯 형제 중에 큰형만 대학을 가고, 그 밑으론 모두 포기해야 했습니다.”

 하단동에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동아중학교에 다닐 때다. 부모가 공부만큼은 제대로 시키겠다며 넣은 사립학교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는 공부와 담을 쌓았다. 그는 “갑작스러운 불행에 화가 나 싸움만 하고 다녔다”고 기억했다. 졸업과 동시에 응시했던 부산해양고에 떨어지고 부산고등기술학교 전자과에 입학했다.

 “공부하고는 잘 안 맞았어요. 해도 해도 안 됐죠.” 최 회장의 첫 번째 열등감은 이렇게 생겼다. 그는 몇 년 전까지도 부산공고를 나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대학 얘기가 나오면 어물거리고 말아버렸다(지금은 “부산고등기술학교 출신이고요, 대학은 안 나왔습니다”라고 정확히 밝힌다고 했다).

#서울 동대문

 그 다음은 ‘돈’이다. 끈질긴 콤플렉스다. 2년 전 최 회장의 체중은 지금보다 12㎏ 많았다. 몸집을 일부러 키웠다. 돈이 많아 보이기 위해서였다. “왜 의류 사업을 했는지, 왜 여성복을 했는지 질문받을 때마다 솔직히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돈 벌려고 했다.” 돈에 ‘지독한 고통’을 당해봐서 가지게 된 생각이라고 했다. 지금도 “너무 어릴 때 사업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건 그 고통 때문이다.

 그는 19세 때 삼촌으로부터 부산 국제시장의 페인트 가게를 물려받았다. 어린 그는 방수 페인트를 만들어 팔면 돈이 된다고 보고 빚을 끌어들여 투자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특허권을 따지 못해 빚만 고스란히 남았다. 사채를 사채로 막으며 시작한 지 7년 만에 사업을 접었다.

 서울 동대문에 자리 잡은 건 3년 뒤인 1982년. 광장시장 한쪽에 한 평(3.3㎡)을 얻었다. 바지를 만들어 소매점에 팔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선 꼭 돈을 벌어 나간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고 기억했다. 오전 4시,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일어나 일터로 나갔다. 남들이 점퍼를 하루에 50~70장씩 만들 때 바지를 하루 2000~3000장씩 찍었다. “애초에 바지를 택했던 것도 많이 만들어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게 필요했는데 바지 생산이 가장 원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깨에 수십 장씩 바지를 걸치고 소매상을 찾아다녔다. 하루 너덧 시간만 잤다.

 그러면서도 ‘나는 동대문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동대문시장 안에서 성공하는 걸 바라는 상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동대문 상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최 회장은 ‘기업가’를 마음에 분명하게 품었다. 아무리 열심히 바지를 만들어 팔아도 ‘브랜드 옷’에는 밀릴 수밖에 없는 걸 봤기 때문이다. 당시 ‘보라매(현 슈페리어)’ 티셔츠, ‘독립문(현 PAT)’ 메리야스를 보면서 한 생각이다.

#서울 역삼동

 그가 갖지 못했던 것, 즉 마지막 결핍은 ‘브랜드’였다. 1985년 ‘크라운’으로 상표 등록을 마치고 바지에 그토록 바라던 태그(tag)를 붙여 팔았다. 아파트 한 채와 고급 승용차를 샀을 정도로 사업이 잘됐다. 1993년 어음을 잘못 관리해 부도를 맞았지만 곧 일어섰다.

 위기에 빠진 그를 도운 게 두 개의 브랜드, ‘비버리힐스 폴로클럽’과 ‘크로커다일’이다. 우선 동대문을 샅샅이 뒤졌다. 동대문 신평화시장에서 인기 있던 ‘비버리힐스 폴로클럽’ 남성복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브랜드의 여성복 상표권을 미국에서 따오는 데 3000만원이 필요했다. 어머니의 아파트를 담보로 잡고, 아내의 적금을 헐었다. 자동차까지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재기의 발판을 만든 곳도 동대문. 남평화시장에 다시 한 평을 마련했다. 그러면서 이름을 ‘형지’라 지었다. 불 화(火)자가 겹쳐 있는 등불 형(熒)자에 터지(址)를 써서 불같은 번성을 꿈꿨다. 94년이었다. ‘비버리힐스 폴로클럽’과 2년 계약이 끝났을 때 ‘크로커다일’을 발견했다. 역시 남성복을 팔고 있던 브랜드였다. 싱가포르 본사를 설득한 끝에 여성복 라이선스를 따왔다. 96년 직원 20명으로 시작했다.

 남들은 영캐주얼이 돈을 번다고 하던 시절이다. 최 회장은 ‘어덜트(Adult·성인)’ 캐주얼에 희망을 걸었다.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젊은 엄마’들과 ‘중년 여성’들이 자기 옷에 신경 쓸 거란 예측 때문이었다. 동대문 경험을 살려 편하고 예쁘면서도 저렴한 옷을 만들어냈다. 기존에 모호하게 나뉘어 있던 중년 여성복의 사이즈를 구체적으로 쪼갰다.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중년 여성 피팅모델을 썼다. 인기는 점점 올라갔다. 크로커다일 레이디는 2007년 국내 단일 브랜드 최초로 매출 3000억원을 넘겼다. 성공을 발판 삼아 샤트렌(2005년), 올리비아 하슬러(2007년), 아날도바시니(2009년) 등 브랜드를 잇따라 론칭했다.

 2009년 서울 역삼동에 7층 빌딩을 올렸다. 서울 포이동에 쪼개져 있던 회사를 한군데로 모았다. 형지어패럴이던 이름을 패션그룹 형지로 바꾸고 알파벳 h자가 불꽃처럼 모여 있는 로고를 만들었다.

 역삼동에 번듯한 건물을 가진 지금도 최 회장은 발품을 판다. 지난해 10월부터 전국의 1300개 매장을 하나하나 방문 중이다. 다섯 달 동안 800곳을 돌았다. 주로 오전 7~8시에 혼자 간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매장을 밖에서 둘러본 뒤 닫힌 문틈으로 봉투 하나를 밀어놓고 나온다. 편지 한 장과 빳빳한 새 돈 10만원이 들어 있다. ‘대리점 사장님께. 고생이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 최병오’

 800개 매장이면 8000만원이다. 그중 절반이 최 회장 개인 돈이었다. “내가 좀 미련해요. 제주도 끝자락, 산골짜기에 있는 매장까지 일 년에 한 번씩 다 찾아갈 겁니다.” 그의 발품 파는 습관은 동대문 시절부터 쌓인 성공에 대한 집념을 보여준다. 최 회장은 “약점이 너무 많아 열심히 산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약점은 많은 것을 낳았다. 직업학교 출신의 최 회장은 2010년 서울대 생활과학대학에 ‘최병오 홀’을 건립해 기증했다. 단국대엔 ‘최병오 강의실’, 숙명여대엔 형지의 브랜드 이름을 딴 ‘샤트레관’이 있다.

#다시 부산

 그는 최근 부산 사하구청장을 만났다. 사하구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하단동이 있는 곳이다. 최 회장은 하단동 1만 평 규모의 부지를 2년 전 사들였다. 여기에 15층짜리 건물을 지어 사무 공간은 물론 영화관·쇼핑몰 같은 문화시설을 넣고, 지역의 분위기를 바꿀 셈이다.

 고향 부산은 악착같은 사업가 한 명을 키워냈다. 그는 다시 돌아가 부산을 거점으로 한 영남권의 번영을 일궈내려 한다. 다음 달 신축에 들어가는 양산물류센터는 5만㎡(약 1만5000평) 규모. 최 회장은 “지역 주민이 경로잔치 때 쓸 수 있는, 열린 공간을 만들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눈을 지그시 감고 이렇게 회상했다. “부지 매입을 위해 하단동을 찾았을 무렵 어느 골목에선가 곰장어 굽는 냄새가 났습니다. 나를 사업가로 키운 ‘가난’을 떠올리게 하는 냄새였지요.”

 아버지가 작고한 후 생계를 위해 그의 어머니가 했던 일이 바로 곰장어 구이 장사였다.

#가족

최병오 회장의 사업 이력에는 가족이 잇따라 등장한다. 19세이던 그에게 페인트 가게를 넘겨준 이는 막내 삼촌이었다. 이어 손윗 동서가 동대문에 한 평짜리 옷가게를 소개해 그를 의류 산업에 끌어들였다.

 누구보다 중요한 인물은 아내 박종길(60)여사다. 처음 연 가게가 93년 부도를 냈을 때 동대문의 다른 의류 가게에서 일하며 최 회장의 짐을 덜어줬다. 최 회장은 “30년 동안의 사업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약 10년마다 위기가 찾아왔다”며 “그때마다 아내가 있어 견딜 수 있었다”고 말했다. 부부는 부도가 났을 당시의 어음을 각각 나눠 보관하고 있다. “어려울 때, 교만해지려 할 때마다 꺼내 본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 웬만한 가전 제품은 15년 넘은 것을 사용했을 정도의 ‘절약형 부부’다.

 최 회장의 세 동생도 패션 분야에서 일한다. 최병구(56) 아마넥스 회장은 ‘아날도바시니 여성’과 ‘예쎄’ 브랜드를 생산한다. 최병철(54) 미강패션 대표는 형지의 크로커다일 바지 생산을 담당한다. 또 형지 브랜드 CMT를 담당하고 있는 최병환(52) 부사장이 막내 동생이다. 최병오 회장은 “의류업에 뛰어든 후 ‘사업이 운명처럼 다가왔다’는 생각을 했다”며 “가족이 모두 같은 업종에서 일하게 된 것도 일종의 운명”이라고 말했다.

연 매출 7000억의 비결

엄마 패션·초저가 … 반 발짝 먼저 뛴다

1993년 11월 최병오 회장 이름으로 발행한 부도 어음. 이듬해 재기에 성공한 그는 이 부도 어음을 가장 소중한 경영 자산으로 간직하고 있다.

‘반 발짝만 삐딱하게 간다’.

 최병오 회장이 소개한 전략이다. 1996년 크로커다일 레이디로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도 그랬다. “모두가 영캐주얼이 돈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30대 이상의 옷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소득수준이 높아지면 소비자가 ‘엄마 패션’에 들이는 돈도 많아진다는 예견 덕분이었다.

 크로커다일 레이디는 모두가 입는 옷을 꿈꾸며 재래시장의 틈새부터 파고들었다. 다른 브랜드들이 노리던 번화가 대신이었다. 경기도 시흥 시장의 1호점에서 시작했다.

 10년 전 ‘엄마 패션’에 체형 표준화를 도입한 것도 최 회장이다. 그는 한국인 체형 분석을 전문 기관에 의뢰해 미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맞도록 옷을 만들었다.

 또 당시 톱 모델이었던 탤런트 배종옥에서 시작해 오연수·송윤아를 모델로 내세웠다. “당시 1000억원도 안 되던 매출 규모로는 무모한 시도였지만, 무리해서라도 조금 앞서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명품 브랜드에 비해 모델 계약을 길게 맺으며 설득하는 과정도 있었다. 크로커다일 레이디가 2007년 단일 브랜드 최초로 3000억원 매출을 돌파한 배경이다.

 최근엔 초저가 브랜드인 CMT로 반 발짝 먼저 나가고 있다. 지난해 론칭했다. “모두가 ‘힘만 들고 돈은 안 된다’고 말렸다. 하지만 5년 내로 잘될 걸로 본다”고 말했다. “패스트 패션이 시장을 개척하면서 소비자들이 옷에 들이는 돈을 점점 줄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가방·액세서리는 명품으로, 옷은 저가로 가는 추세를 예견하고 있다.

 중국 시장 또한 현재보다 미래를 낙관한다. 형지는 2006년 중국 법인을 세웠다. 최 회장은 “생각보다 현재 실적은 좋지 않다. 하지만 중국 또한 소득 수준이 올라가면 한국처럼 우리 회사 옷을 많이 찾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 회장은 지난 2년을 “성장이 정체돼 다소 위기를 겪었다”고 돌아봤다. 지난해 매출 1조원을 목표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브랜드를 급격히 늘려 관리가 버거웠다”고 진단했다. 8개 브랜드 중 넷을 2008년 말 이후 론칭했다. 남성캐주얼 아날도 바시니, 여성 아웃도어 와일드로즈 등이다.

 최 회장은 짐을 나누기로 했다. 그래서 지난해 말, 올해 초에 최고경영자(CEO) 두 명을 영입했다. “옷만 30년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누구보다 잘한다는 오만이 있었는데, 이제 든든하고 마음이 가볍다”고 말했다. “매출 200억원쯤 하는 회사를 운영하는 친구가 ‘꼭 CEO를 두라’고 해서 ‘매출 2조원쯤 하면 두겠다’고 오기를 부렸는데, 지금은 이해가 된다”고도 했다.

 최 회장은 2015년 매출 3조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남들이 안 된다고 하는 것도 조금씩 빨리 하겠다”고 말했다. 지금껏 회사를 키워온 정신이다. 매출보다 더 큰 목표는 ‘국민 옷’이다. 소수를 위한 옷을 만들지 않는 것이 최 회장의 경영철학이다.

그는 “최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호두과자를 파는 아줌마가 ‘크로커다일 할인권 좀 달라’고 해 고민에 빠졌다”고 전했다. “그만큼 비싸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국민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거다.

지금은 8개 브랜드에서 한 해 1500만 장의 옷을 찍어낸다. 앞으로 대한민국 인구보다 많이 찍어야 ‘국민 옷’이 된다. ‘엄마 패션’을 넘어 ‘국민 패션’으로 가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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