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에겐 … 괘씸한 류샤오치, 기특한 린뱌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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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호 33면

문혁이 시작되면서 마오쩌둥(왼쪽 첫째)의 옆자리를 린뱌오(둘째)가 차지했다. 1966년 9월,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추기 직전의 류샤오치(셋째). 곤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김명호 제공]

1958년 8월 17일부터 2주간,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열린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는 “전 국민이 1070만t 철강 생산을 위해 분투할 것”과 “인민공사 설립”을 통과시켰다.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의 시작이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61>

대약진운동은 소련의 흐루쇼프가 “마오쩌둥이 방구 한번 시원하게 갈기려다 바지에 똥쌌다”며 빈정댈 정도로 철저히 실패한 정치운동이었다. 1959년부터 3년간 계속된 대기황(大饑荒)도 한 몫을 했다. 1998년 중공 중앙당교가 펴낸 책자에 “1959년부터 61년까지 비정상 사망과 출산 감소로 인구가 4000여 만 명 줄었다”고 인정할 정도로 20세기 최대의 기근(饑饉)이었지만 마오쩌둥의 과도한 실험정신이 빚어낸 정책적 착오였다.

1962년 1월 11일, 베이징에서 ‘7000인 대회’가 열렸다. 전국의 성·자치구·현·공기업·군부대의 5급 이상 7118명이 참석해 24일간 열린, 전대미문의 대형 회의였다. 중앙을 대표해 국가주석 류샤오치가 공작보고를 했다.

류샤오치는 “성적은 중요하지 않다. 결점과 착오가 중요하다”며 그간의 좌경화를 비판했다. 후난(湖南)에 갔을 때 농민에게 들었다는 말을 인용했다. “하늘이 내린 재앙은 30%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인간이 만든 재난(人禍)”이다. 대약진운동을 지지한 마오쩌둥에 대한 완곡한 비판이었다. 총서기 덩샤오핑 등 고위지도자들과 합세해 소련식 민주집중제(民主集中制) 실행을 강조했다.

마오쩌둥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었다. 옌안(延安) 시절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도 류샤오치였고, 마오쩌둥 만세를 처음 부른 사람도 류샤오치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마오쩌둥도 “그간 중앙당이 범한 모든 착오는 내 책임이 제일 크다. 간접적인 착오도 첫 번째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며 이들의 의견에 동조했다.
의심벽이 심한 마오쩌둥은 후계자로 여겼던 류샤오치의 충성심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후계자 주제에 스탈린이 죽자마자 시신에 칼을 들이댄 흐루쇼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사람이 아니었다.

류샤오치의 보고 이틀 후, 그간 말 한 마디 없던 국방부장 린뱌오(林彪·임표)가 발언에 나섰다. 린뱌오는 평소 군사문제 외에는 의견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 당의 업무에 관해서도 덩샤오핑의 주장을 답습하는 정도였다.

“최근 몇 년간 곤란한 일이 많았지만 인민과 당은 새로운 것을 창조했다. 우리의 방향은 정확했다. 비판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 실행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지 노선의 착오는 아니다”로 시작된 린뱌오의 발언은 불세출의 전략가답게 논리가 정연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물질은 잃었지만 정신적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며 그간의 손실을 학비에 비유했다. “어린애가 소학에 입학해 대학을 마칠 때까지 생산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소요되는 물질과 시간은 낭비가 아니다. 학비를 충분히 부담해야 사람 노릇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군대도 예로 들었다. “우리는 전쟁 중이 아니라도 총 쏘고 대포 갈기는 게 일이다. 수많은 실탄과 포탄을 허비하고 막대한 양의 기름을 하늘과 바다에서 허비한다.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린뱌오는 책임론도 거론했다. “모든 문제는 마오 주석의 지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키는 대로 했다면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주석은 우리의 영혼이다.”

마오쩌둥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저우언라이가 린뱌오의 발언에 군사기밀이 포함돼 있었다고 하자 “비밀은 무슨 놈의 비밀”이냐며 핀잔을 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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