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55) DJ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독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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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DJ정부에서 2년 반 동안 구조조정을 이끌었던 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 그가 DJ와 단둘이 대화를 나눈 것은 단 한 차례였다. 그것도 사의를 표명한 뒤에야 성사된 5분간이 전부였다. 사진은 1998년 4월 9일 금융감독위원장 임명장을 받은 직후 청와대 접견실에서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 김대중 대통령, 영부인 이희호 여사, 이 위원장의 부인 진진숙씨. [중앙포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DJ에게 말했다. 내 옆엔 이기호 경제수석이 앉아있었다. 2000년 7월 중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온 터였다. DJ는 ‘아,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기호 수석에게 손짓을 했다. “잠깐 나가 있지.” 대통령을 독대하고 싶다는 내 청을 비서실 직원이 전달한 것이다.

 이기호는 머뭇거리다 나갔다. 대통령과 재정경제부 장관의 독대. 내가 정부 일을 맡은 지 2년 반 만에 처음 온 기회였다. 금융감독위원장으로 구조조정의 큰 틀을 짰고, 재정경제부 장관을 맡아 나라 곳간을 책임졌음에도 그랬다. 섭섭하지는 않았다. 애초 DJ의 정치적 동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

 다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재경부 장관으로 나는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 정치권의 견제가 심했다 해도 자책감이 남았다. 독대를 청한 건 그래서였다. 떠돌이 같은 나를 발탁해 중책을 맡긴 DJ다.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세 가지 있습니다.”

 그만두기 전에, 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사의를 밝힌 걸 모를 리 없다. 한광옥 비서실장에게 이미 5월에 전한 사의다. DJ도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된 시간은 5분 남짓.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우선 대미 채널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화당과는 대화가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필요하시면 제가 대화를 주선해보겠습니다.”

 그해 1월 부시가 취임했다. 3월에 DJ를 초청해 놓고 “디스 맨(this man)” 운운해 잡음이 있기도 했다. 이 일이 아니어도 DJ쪽 사람들이 공화당과 끈이 약하다는 건 사실이었다. 싫든 좋든 미국 정부와 대화하지 않을 순 없다. 정부를 떠나더라도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돕고 싶었다. 후버연구소나 헤리티지재단 같은 유명 싱크탱크를 활용해 볼 심산이었다.

 “주택과 교육 문제에 힘을 쏟을 때입니다. 건설교통부에 지시해서 급한 대로 임대 주택이라도 지어 서민 주거를 안정시키셔야 합니다. 그리고 도심 서민 주거지역의 환경을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학 학자금 지원 제도를 본격 도입할 때가 됐습니다.”

 위기가 지나갔지만 서민은 더 가난해졌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돈이 급한 이들은 집을 내놓고 자녀의 대학을 휴학시켰다. 정신 없이 추락할 때는 서글픈 처지도 모른다. 위기가 잠잠해지면 감정이 올라온다. 미리 손을 써야 한다. 위기 때 쓴 정책을 정상 정책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혁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금융과 기업 쪽만 윤곽이 잡힌 상태입니다. 나머지는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투입한 공적자금은 빨리 회수해야 합니다. 임기 안에 끝내셔야 합니다.”

 금융과 기업. 해외 시장에 노출된 이 분야는 가장 먼저 개혁의 칼날을 맞았다. 하지만 농업·공공부문 등은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상태였다. 사실 이 부문들은 개혁하기가 위기 전보다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구조조정 당하는 금융권과 기업을 보며 이들은 똘똘 뭉쳤다. “절대 개혁은 없다”고 반발하고 나섰다. 이때 개혁이 된 부문과 아닌 부문은 지금 현격한 경쟁력 차이를 보인다.

 DJ는 고개를 조금씩 끄덕이며 내 말을 듣기만 했다. 5분이 지났을까, 비서실 직원이 들어와 기척을 했다. 다음 일정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일어섰다. DJ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을 했다. “수고하세요.”

 DJ는 이날 내 얘기를 기억했던 모양이다. 이후 한화 김승연 회장을 앞세워 헤리티지재단을 접촉한다. 이듬해 8월엔 “임대주택 15만 호를 짓겠다”고 발표한다. 서둘러 짓다가 “싸구려 주택을 지어 서민 차별한다”는 논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말이다.

 미완의 개혁. 이 부분만은 DJ는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다. 이미 1999년 8월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를 조기 졸업하겠다”고 선언한 그다. 한시바삐 구조조정을 매듭짓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로 DJ는 2001년 8월 IMF에서 빌린 195억 달러를 전액 상환한다. 국내외에 “한국의 외환위기는 끝났다”고 선포한 셈이다. 시장은 활력을 되찾았다. 국민은 마음을 놓았다. 나로선 아쉬웠다. 위기만큼 좋은 개혁 기회는 없다. 한번 크게 흔들린 조직이 엉뚱하게 자리 잡기 전에 새 모양을 만들어 놓는 게 최선이다. 공공부문은 결국 개혁을 겪지 않고 자리 잡아 버렸다. 이 부담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부 공공부문은 부채비율이 아마 민간의 네댓 배는 될 것이다. 고통을 수반하는 구조조정을 외면한 결과다.

 청와대를 나오는 마음은 무거웠다. 집권 후반기, DJ는 예전처럼 꼼꼼하게 경제를 챙기지 못했다. 은행 민영화도, 공적자금 회수도 모두 뒷전이 됐다. 대북 관계와 노벨평화상 등 머리를 어지럽히는 현안들이 너무 많아서였을까. 이미 그의 주변엔 기술자 대신 정치인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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