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전’을 쓰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60호 38면

괴테는 늘 머리맡에 펜과 노트를 두고 잠들었다고 한다. 자다가 떠오른 생각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그는 꿈속에서 정말 굉장한 영감이 떠올랐다는 사실을 알았다. 괴테는 잠깐 잠에서 깨어 그 위대한 영감이 휘발돼 버리기 전에 얼른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흐뭇하게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기쁨과 흥분으로 떨며 노트를 펼쳤을 때 괴테가 발견한 것은 그저 하나의 선이었다고 한다.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나도 잠들 때 머리맡에 노트와 연필을 챙겨 둔다. 그러나 나는 꿈속에서 영감이 떠오르기는커녕 제대로 된 꿈을 꾼 적이 거의 없다. 어쩌다 꾼 꿈도 아침에 기억해 보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이미지의 파편에 불과했다. 그러니 작가가 되기에는 애초에 틀려먹은 것이다.오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한 문장이 떠올랐다. “자서전들 쓰십시다.” 그건 이청준의 단편소설 제목이지만 오래 전에 읽어서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간밤에 나는 모처럼 꿈을 꾸었다. 그것도 온전히 기억나는 꿈을.

꿈속에서 나는 노인이다. 나는 교실에 앉아 강의를 듣고 있다. ‘자서전 쓰기’ 수업. 강사는 젊고 예쁜 여성이다. 그녀는 자서전을 쓰면 좋은 점에 대해 말한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지만 한편으론 기록하는 자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저 말은 언젠가 내가 쓴 문장인데. 학생인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노트에 옮겨 적는다.

“자서전을 쓰라고 하면 대개 시간 순서대로 써보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청소년 시절, 청년 시절, 장년 시절 등. 물론 그렇게 쓰는 것이 자연스럽고 일반적이지만 맹점이 있습니다. 쓰다가 어느 한 부분에서 막히면 글 진행이 영 어렵다는 것이죠. 인생의 어느 대목은 통 기억이 안 날 수도 있잖아요. 그럼 거기서 한 발짝도 나가질 못한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서전이 아니라 ‘자사전’을 써봅시다. ‘자사전’, 즉 자신만의 사전을 만들어 보자는 거죠.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다 적어봅니다.

적을 수 있을 때까지 생각나는 것은 모두 적어봅니다. 만일 떠오르는 낱말이 없다면 보조장치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국어사전을 하나 마련해서 옆에 두고 아무 데나 펼쳐봅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가 닿는 단어가 있을 거예요. 그 낱말이 내 삶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내 인생의 눈으로 본다면 그 말은 어떻게 정의돼야 하는지, 그 말과 관련된 내 삶의 에피소드는 무엇이었는지 그런 것을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기록합니다. 그렇게 낱말마다의 글이 모이면 그걸 자기 인생의 맥락에 맞게 편집합니다. 그러면 그게 바로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 자서전이 되는 겁니다.”

책상에 있는 국어사전을 펼치려는데 강사가 나를 지명한다. “김 선생님은 지금 어떤 단어가 떠오르세요?” 나는 꿈속에서도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다. 얼굴이 붉어지고 말을 더듬거린다. 선생님이 재촉하는 눈빛으로 내 대답을 기다린다. 부끄러움도 많지만 솔직하기도 해서 나는 그만 이렇게 중얼거린다. “여자요.” 나처럼 늙은 학생들이 와르르 웃는다.

나는 웃음소리에 그만 꿈에서 깬다. “인생은 한바탕 꿈”이라고 말한 건 누구였나. 이참에 나도 자서전을 써볼까. 아니 ‘자사전’을 써볼까. 그것이 결국 괴테가 아침에 발견한 것처럼 한낱 긴 선에 불과할지라도.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