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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안정 급한 김정은, 미국과 대화의 길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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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한이 핵시설의 불능화 조치를 취한 직후인 2008년 2월 영변을 방문한 지그프리드 헤커 스탠퍼드대 박사가 핵연료 가공 공장에서 비닐에 싸인 장비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 북한은 헤커 박사가 2010년 11월 다시 방북했을 때 공개한 우라늄 농축 시설의 가동 중단 입장을 지난달 23~24일의 북·미 3차대화에서 표명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중앙포토]

김정은 체제의 북한이 미국과 대화를 택하면서 긴장 일변도로 치달았던 한반도 정세가 변곡점을 맞게 됐다. 북한과 미국은 베이징 회담(2월 23~24일)에서 6자회담 사전조치의 핵심 사항인 우라늄 농축시설의 가동 중단과 식량지원에 전격 합의했다. 2008년 12월 중단됐던 북핵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절차에 들어간 것이다. 또 김정일 사후 ‘시계(視界) 제로’ 상태였던 북한 신지도부의 안정성과 정책방향이 국제사회의 가시권에 들어오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워싱턴과 평양이 동시에 합의 사항을 발표한 것도 이례적이다. 북·미 양측이 향후 합의사항 이행 과정에서 성의 있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기 위한 ‘퍼포먼스’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다만 합의 발표가 늦어진 데 대해 정부 관계자는 “제네바 합의 때처럼 두 번 속을 수 없다며 강경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워싱턴 조야의 승인을 받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지난해 말 김정일 사망 직전 북한과 잠정 합의한 것보다 식량의 양과 품목에서 양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당초 ‘군용으로 전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며 영양 비스킷 같은 식품으로 24만t을 지원하겠다고 했었다. 식량지원 대신 ‘영양지원’이란 신조어까지 만들었다. 이번에 미국은 지원 규모를 30여 만t으로 늘리고, 옥수수 등 알곡의 비중도 높였다. “부시 행정부 때 지원하다 중단된 잔여분 33만t을 제공해야 한다”는 북한 주장을 상당폭 수용한 것이다.

 미국이 유연한 자세를 보인 것은 김정은 체제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테스트 성격도 크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에 손을 내밀어 비핵화 문제 등에서 북한의 전향적인 변화를 유도하려는 미국의 의지가 강하다”고 설명했다. 김정일이 사망 직전 추진한 대화정책을 북한의 새 지도부가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만큼 미국도 이를 새로운 국면전환의 기회로 살리고 싶어 한다는 얘기다.

 북한 역시 김정은 체제의 안착을 위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택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강성대국 진입 원년으로 선언한 4·15 ‘태양절’(김일성 주석의 100주년 생일)을 앞두고 북한은 대규모 식량이 필요한 상황이다. 또 김정은의 통치력 강화를 위해서도 대미 관계개선과 주변정세 안정은 필수적이다.

 이런 정세 변화가 우리에게 반드시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다. 지난해 여름 인도네시아 발리의 남북 비핵화 회담을 시작으로 구축해 놓은 ‘남북회담과 북·미 회담 병행 프레임’이 완전히 흐트러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전형적인 통미봉남(通美封南·남한을 배제한 채 미국과 대화만 추진하는 북한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북한은 4·11 총선과 대선 등 남한의 선거를 앞두고 강경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남북대화 개선→비핵화 진전→남북대화 개선이라는 선순환 구조가 바람직하지만 실질적인 비핵화의 진전을 위해 남북 비핵화 회담을 고수하고 있진 않다”면서도 “향후 사전조치 이행 논의 등이 진전되면 적당한 때 3차 남북 비핵화 회담도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한국과 미국은 북한이 약속한 사전조치의 이행 과정을 보면서 6자회담 재개 문제를 다룰 방침이다. 재개 여부의 관건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방북 시기와 절차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의 중단 방식 등에 달려 있다. 문제는 이번 UEP 가동중단의 대상이 영변으로 한정됐다는 점이다. 소규모로 운영이 가능한 UEP 시설은 북한이 스스로 공개하기 전에 찾아낼 수 없다. 따라서 6자회담이 재개된다 해도 북핵 해결은 ‘산 너머 산’이란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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