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교 달인] 오금고 동아리 ‘신나는 화학반’ 황준호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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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 김병만씨는 한 방송 프로그램의 ‘달인(達人)’ 코너에서 다양한 재능을 선보였다. 동료 개그맨을 목마 태워 평균대 위를 뛰어다녔고, 외발 자전거를 타고 줄넘기를 했다. 하지만 그는 타고난 재주꾼이 아니라 ‘노력의 달인’이었다. 요즘 사회는 공부만 잘하는 사람보다 한 분야에서 특출한 재능을 가진 인재를 더 원한다. 학창시절부터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해 발전시켜나가는 게 중요하다.

전민희 기자
사진=김진원 기자

지난 9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송파구에 있는 오금고의 과학실험실. 누군가 말린 바나나껍질로 뭔가를 하고 있다. 이 학교 2학년생인 황준호(17)군이다. “뭐 하는 거냐”는 질문에 “실험 중이니 나가 있으세요” 한다. 30분 남짓 지나 그가 실험실 밖으로 나왔다. “바나나껍질을 이용해 기름을 빨아들이는 흡착제를 만들고 있었어요. 실험할 때 한 눈 팔면 오차가 생기기 마련이거든요. 기다리게 해 죄송합니다.”

황군은 학업성적만 보면 우등생이 아니다. 학교 내신시험이나 수능 모의고사 성적이 상위권과 중위권을 넘나든다. 그러나 과학실험에서는 ‘달인’으로 불린다. 교내 화학반 부장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실험을 주도하고, 중학생 때부터 지역교육청과 학교에서 실시한 탐구발표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고2 때는 ‘쓰레기로 버려지는 바나나껍질의 재발견-납 이온 흡착제로서의 탄생’이란 제목의 탐구보고서를써 대한화학회에서 발행하는 잡지 ‘화학교육’에 실리기도 했다.

황군이 과학실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중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이다. 아버지 친구가 운영하는 경기도 하남의 한 사설연구소를 방문했다. 아들이 과학에 재능이 있음을 알고 있던 아버지가 데리고 간 것이다. “연구소를 처음 갔을 때, 코를 찌르는 화학약품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팠어요. 화학약품 냄새를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요? 하지만 저는 그 냄새가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어요. 인연이 되려고 그랬나 봐요.”

5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 연구실은 황군의 놀이터이자 ‘꿈의 산실’이 됐다. 처음 8개월 동안은 연구소 청소를 도맡아 하며 어깨너머로 연구원들의 실험 장면을 보곤했다. 이후 촉매반응과 중력가속도 측정 같은 기초실험을 하면서 과학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다. “처음 잡은 스포이트의 감촉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가 다양한 과학 분야 중에서도 신소재나 기름·납 이온 흡착제로 관심영역을 구체화시킨 것은 중1 말 태안 기름유출사고가 터졌을 때다. 텔레비전을 통해 사람들이 수건을 들고 바닷가 돌멩이를 닦는 모습을 본 황군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수건으로 닦을 게 아니라 기름 빨아들이는 기계를 사용하면 사람들이 고생 안 해도 되는 것 아닌가?” 그러고는 기름흡착제와 관련 있는 각종 책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기존에 주로 쓰는 기름흡착제는 많은 비용이 들고, 기름유화제를 사용하면 또 다른 환경오염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마침내 황군은 ‘값싸고, 친환경적인 신소재로 만든 기름 흡착제를 개발하겠다’는 목표를 정했다.

이때부터 연구원들에게 기름흡착과 관련된 내용을 물으며 지식을 쌓았다. 이런 열정 덕분에 중3 때 ‘수용성고분자를 이용한 친환경적인 기름흡착실험’이란 제목의 보고서로 강동교육청 주최 학생탐구발표대회에서 은상을 받았다.

강동구에 있는 둔촌중을 졸업한 황군이 관내 고교 대신 오금고를 선택한 이유도 과학실험 동아리 ‘신나는 화학반’ 때문이었다. 그의 고교 선택 기준은 ‘과학동아리가 얼마나 활성화돼 있는지’였기 때문이다. 신나는 화학반에서 그는 식물 DNA 추출과 같은 실험을 구상하고 설계하면서 동아리 회원들의 실험을 이끌었다. 그러면서 ‘값싸고 친환경적인 기름·납 이온 흡착제 개발’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황군이 미소를 지었다. “기자님은 언제까지 기자생활을 하실 거예요?”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말을 이었다. “저는 평생 화학약품 냄새를 맡으며 과학실험을 할 거거든요. 제가 나중에 기발한 소재를 개발하면 연락 드릴 테니, 그때까지 기자생활을 하고 있으시면 꼭 다시 인터뷰해주세요.” ‘미래과학자에게 사인이라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오금고 정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순간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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