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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편집장일 때도, 일간지 논객일 때도 사람 사이엔 늘 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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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호 35면

문학평론가로 관훈클럽 총무, 신영연구기금 이사장 등을 지낸 이광훈씨. [사진 =관훈클럽·민음사 제공]

지난 14일 문학평론가이자 언론인인 이광훈(1941~2011)의 1주기를 맞은 추모문집 출판기념회가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추모문집은 그가 남긴 평론과 칼럼, 그리고 그와 가까웠던 문단과 언론계 인사들의 추모 글 등 3권으로 이루어졌다.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김종길·김용직·고은·박맹호·김치수·조선작·김화영 등 문인과 조용중·정종식·남재희·남시욱·손세일·송정숙·최종률·권영빈 등 언론인 100여 명이 참석했다. 굳이 여러 인사들의 이름을 거명하는 까닭은 그날 참석자의 대다수가 문단과 언론계의 대선배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광훈은 나와 동갑이고 학번도 같았지만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60년대 초부터 문학 활동을 시작했고, 언론계 진출은 다소 늦었지만 특유의 친화력과 남다른 포용력으로 두터운 인맥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47> 문단·언론계 ‘지남철’ 이광훈

경북 안동 태생인 이광훈은 고려대 국문과 재학 중이던 63년 종합월간지 ‘세대’의 초대 편집장을 맡으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5·16 군사혁명의 주체세력이었던 이낙선이 ‘세대’를 창간하면서 동향에다 인척이기도 한 이광훈을 편집장에 발탁한 것이다. 이 무렵 그는 성균관대의 임중빈, 서울대 문리대의 조동일·주섭일 등과 함께 ‘비평작업’이라는 동인 활동을 펴면서 ‘문학춘추’의 추천을 받아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창간 이듬해인 64년 황용주가 쓴 ‘강력한 통일정부에의 의지’로 반공법 위반 필화사건을 겪기도 했지만 ‘세대’는 호를 거듭할수록 탄탄한 기반을 구축했다. 특히 문학사에 남을 만한 여러 작가와 작품들이 ‘세대’를 통해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이광훈의 비범한 안목에서 얻어진 성과였다.

이병주가 65년 500장이 넘는 중편소설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뒤를 이어 박태순과 신상웅이 각각 제1회와 제3회 ‘세대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외수도 ‘세대’ 출신이었다. 홍성원의 ‘육이오’와 이병주의 ‘지리산’ 등 문제작 대하소설을 과감하게 장기 연재한 것도 ‘세대’였다. 특히 71년 ‘신춘문예 선외작 공모’라는 행사를 마련해 조선작의 ‘지사총’을 발굴해 낸 것은 특이하고 참신한 시도라고 평가받았다. 이광훈은 72년 발행인 겸 사장의 자리에 올라 77년 퇴임하기까지 14년 동안 ‘세대’를 이끌어왔다. ‘세대’를 떠난 뒤에는 곧바로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신문기자 경력이 전무한 채로 중앙일간지의 논설위원에 발탁된 것은 파격적이었다. 신문사에서는 그가 제대로 언론인 생활을 꾸려갈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고, 문단의 선후배들도 그가 신문사의 배타적인 특성을 극복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모두가 기우였다. 문단에서도, 언론계에서도 그는 선배와 후배를 동시에 아우르는 남다른 재주를 가졌다. 가령 그보다 나이가 열 살 가까이 위인 남재희는 “이광훈과 만나면 나이 차이를 전혀 느끼지 않고 늘 동년배의 분위기에서 어울렸다”고 회고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모임에서 누구나 이광훈의 곁에 앉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가 문화부장을 거쳐 편집국장·논설주간을 지내고, 관훈클럽 총무와 신영연구기금 이사장 등을 역임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존재감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광훈은 키가 1m90㎝에 이르는 장신이었다.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사람 없다’는 말이 있지만 그와 가까웠던 문단과 언론계 사람들은 “이광훈은 예외”라고 입을 모은다. 사실 그는 그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유머와 위트가 매우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의 걸쭉한 입담은 ‘싱거운 재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촌철살인적인 예리한 뼈’가 들어 있다. 그는 신문사 후배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해학적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내가 촌놈처럼 보이지만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나왔다는 게 첫째, 기계에 둔한 서생 같지만 운전을 할 줄 안다는 게 둘째, 서민 풍모를 풍기지만 골프를 친다는 게 셋째….”

이런 일화도 있다. 언론인 여럿이 문화 탐방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 버스가 이광훈의 고향인 안동에 들어서 그가 졸업한 초등학교 앞을 지날 때 누군가 말했다. “저렇게 조그마한 초등학교에서 이광훈 같은 거물이 배출됐는데 금의환향을 환영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이광훈이 즉각 말을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봐 어제 시장·경찰서장·지방검사장 등 기관장들에게 전화를 해서 어떤 식으로든 환영행사를 벌이면 불이익을 줄 것이라고 엄포를 놨지.”

이광훈은 기골이 장대하면서도 건강을 챙기는 편이었다. 등산과 골프를 즐겼고, 술자리에도 늘 빠지지 않으면서도 술은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가 신우암 판정을 받은 것은 2010년 여름이었다. 그러나 그는 발병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고, 문단과 언론계의 지인들이 그를 만나고자 하면 언제나 모습을 드러냈다. 발병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말수가 줄어든 것뿐이었다. 그가 숨을 거둔 것은 이듬해 2월 2일 설날 연휴가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장례가 끝난 뒤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60년대 이후의 문단과 잡지계, 그리고 언론계에 남긴 그의 자취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정규웅씨는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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