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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감식, DNA감정, 물감분석 다 실패 … 미궁 속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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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호 06면

고 이중섭 화백의 일본인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사진)씨가 2005년 일본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당시 위작 논란에 휘말린 남편의 그림들에 대해 “유족이 보관해오던 진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른쪽 석 점의 그림은 위작 논란에 휩싸인 이중섭의 작품으로, 위에서부터 ‘사슴’ ‘물고기와 아이’ ‘아이들’이다. [중앙포토]

진짜일까, 가짜일까.
2005년 우리 미술계를 뒤흔들었던 이중섭·박수근 화백의 ‘사상 최대 위작(僞作) 사건’의 실마리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감정(鑑定)이 쉽지 않아 진위를 가리기 위한 재판이 4년째 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섭·박수근 위작 재판 4년째 표류, 왜?

위작 논란에 휩싸인 작품은 국민화가 이중섭(1916~56)의 그림 1069점, 박수근(1914~65)의 작품 1765점 등 총 2834점이다. 검찰이 그림 소유자인 김용수(73) 한국고서연구회 고문을 2007년 사기 혐의로 구속하면서 그림의 위작 여부는 곧 가려질 듯한 분위기였다. 김씨는 이 그림 중 5점을 9억1000여만원에 팔아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2009년 2월 1심 재판부는 “김씨가 소장한 2800여 점 중에는 베낀 듯 일치하는 그림이 여러 개 있다”며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김씨가 팔았거나 소장하고 있는 두 화백의 그림들이 위작임을 1심 재판부가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항소한 김씨가 판사 출신 구도일(71) 변호사를 내세우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구 변호사가 1심과 달리 ‘과학감정’으로 진위를 가리자고 나오면서 재판부의 고민이 깊어졌다. 진위를 가릴 방법이 마땅치 않아 재판이 장기간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주민등록제도 시작된 1968년 전 작고
김씨 측이 주장한 과학검정 첫째 항목은 지문감식이었다. 김씨 소유의 그림 중 이중섭 화백의 유화 가장자리에 지문이 찍혀 있는 것이 계기였다. 그림에 남아 있는 지문은 확실했다. 하지만 이 화백의 지문 원본이 없어 대조가 불가능했다. 주민등록 제도가 1968년 시작돼 56년 작고한 이중섭의 지문은 어디에도 보관돼 있지 않다.

김씨 측은 ‘이중섭 화백의 진품 중 지문이 찍혀 있는 작품’을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했다.

김용수 한국고서연구회 고문

난관에 부닥치자 김씨 측은 2010년 7월 법원에 ‘DNA 감정’을 신청했다. 압수된 그림 중 이 화백의 머리카락이 붙어 있는 작품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재판부는 직접 감정 현장에 나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소속 전문가도 동행했다. 이 화백의 작품 중 B5 크기의 ‘흰 소’에서 4㎝ 길이의 털을 채취했다. 김씨 측은 이 화백의 차남 태성(63·일본 이름 야마모토 야스나리)씨에게서 모발을 받아 보관하고 있던 터라 사건은 쉽게 풀릴 듯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국과수로부터 “감정이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태성씨의 모발에서 뽑아낸 DNA와 비교하기에는 채취한 털이 너무 훼손돼 부자관계를 증명하기 어려웠다. 세월이 너무 흐른 탓이었다. 다만 그림에서 채취한 털이 사람의 체모라는 사실은 확인됐다.

이제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모계로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DNA’ 검사를 하는 것이었다. 이 화백의 여자 형제가 필요했지만 평안남도 평원 출신인 이 화백의 누이를 찾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김씨 측은 누이가 6·25 당시 남한으로 내려와 이화여전(현 이화여대)을 졸업하고 경기도 광주 인근에 산다는 것까지를 추적하는 데 그쳤다. 살
아 있다면 100세 정도의 나이라 생사도 불투명했다.

김씨 측이 동원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그림에 사용된 물감의 성분감정이었다. 검찰은 2007년 김씨를 기소하면서 가짜 그림의 증거로 화합물인 ‘산화티탄피복운모(TiO₂ mica)’를 소재로 한 금색·은색 ‘펄’이 들어간 물감이 사용됐다고 밝혔다. 이 물감은 이 화백과 박 화백이 사망하고 훨씬 뒤인 84년 독일 머크사에서 자동차용 도료로 시판되기 시작해 미술용으로 쓰인 것이었다. 수사 당시 검찰은 그림 중 일부를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경주박물관, 서울시립 역사박술관, 요업기술원에 의뢰해 물감 성분검사를 진행했다. 산화티탄피복운모는 그림들이 가짜라는 결정적 단서였다. 검찰은 이 중 유일하게 산화티탄피복운모가 검출됐다는 요업기술원의 시험 결과를 인용해 “80년대 중반부터 판매된 물감이 김씨 소장품에 쓰였다”는 것을 위작 증거로 제시했다.

김씨 측은 반박했다. “물감 입자를 절단해 절단면을 촬영, 분석해야 함에도 요업기술원은 그런 실험을 하지 않았으니 결과는 부정확하다”는 것이었다. 요업기술원을 제외한 4곳의 기관에서 시행한 실험에선 물감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 단위인 ‘원소’만이 검출됐다. 그런데 여기선 산화티탄피복운모의 주성분인 티타늄(Ti)과 실리콘(Si)이 함께 검출되지 않았다. 구 변호사는 요업기술원을 제외한 4곳의 기관에 “8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한 물감이 그림에서 나오는가”를 조회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물감을 구성하는 원소 검출 실험만 했기 때문에 그 이상은 알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구 변호사는 “재판부에 해외 등 다른 기관에 물감 성분분석을 의뢰하자고 제안했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면서 “최근 법원 인사로 담당 재판장이 세 번째 바뀌어 앞으로 언제 재판이 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런 사정으로 볼 때 미술계는 이중섭·박수근 작품의 위작 여부를 가리기 어려울 것으로 보는 분위기다. 이 사건은 2005년 이 화백의 아들인 태성씨가 서울옥션을 통해 그림을 내놓으며 불거졌다. 이씨는 “아버지의 유작으로 50년간 보관해오던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물고기와 아이’를 3억2000만원에 판매했다. 또 ‘두 아이와 개구리’(3억3948만원), ‘가지’(5772만원), ‘사슴’(4662만원), ‘아이들’(1억6540만원) 등 4점이 서울옥션 경매를 통해 팔렸다. 이씨가 “망우리 묘역에 묻혀 있는 아버지 이장비용을 마련하겠다”며 그림을 팔아달라는 김씨의 제안을 수락하면서 이뤄진 일이었다. 이름을 빌려준 대가로 태성씨가 김씨로부터 얼마를 받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태성씨가 일본 국적자였기 때문에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민화가로 추앙받아오던 이 화백의 미공개작이 동시에 시장에 나오자 한국미술품감정협회는 감정에 들어가 이 작품들이 ‘위작’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서울옥션과 한국미술품감정협회 간의 자존심을 건 대결로 사건이 번진 셈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각 그림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선 2834점의 작품을 모두 감정해야 하는데 선뜻 감정을 하겠다고 나서는 곳은 없었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감정인들이 서울옥션과 협회의 관계를 생각해 섣불리 나서기가 부담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작품 수 2834점 “너무 많다” “원래 다작”
현재 2834점의 그림은 검찰이 압수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보관 중이다. 검찰은 2834점 모두 위조품이라는 입장이다. 이 그림들이 오래된 한지나 화첩을 사용해 각종 전시회 등을 통해 소개된 진품의 도록(圖錄)을 짜깁기 형식으로 조합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검찰은 특히 박수근의 ‘한복을 입은 여인’ 등 19점의 그림은 이모(69)씨가 중학교 2학년 때 그린 그림을 박수근 화풍으로 만든 뒤 작가의 서명까지 복제했다고 말한다. 이뿐이 아니다.

김씨가 그림을 대거 구입했다고 주장하는 시점이 70년대인 데다, 인사동 고서점에서 당시 집 한 채 값을 주고 그림을 사들였다는 김씨의 주장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가 어렵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런 정황들을 고려해 1심 재판부는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박수근 그림이라고 주장하는 것 중엔 이씨가 어릴 때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다”고 봤다. 또 “그간 두 화백의 진품이라고 밝혀진 작품 수에 비해 김씨가 보유하고 있는 작품의 수가 너무 많고, 그림을 수집하게 된 경로가 불분명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김씨 측은 “2834점이나 되는 많은 그림을 보유하게 된 것은 이중섭과 박수근이 생전 습작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중섭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짧은 기간에 113점의 작품을 완성했고 새해엔 하루에 꼭 두 점씩 그리겠다”고 한 부분도 제시했다. 구 변호사는 “그림 중 대다수는 두 화가의 습작으로 53~57년 사이의 것들”이라며 “위작을 하려면 돈이 목적인 것인데 굳이 드로잉 같은 습작을 만들 이유가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한국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는 42억2000만원에 낙찰된 박수근의 ‘빨래터’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위작 논란에선 자유롭지 못했다. 경매 직후 ‘표현기법이 생경하고 보존상태가 너무 완벽하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박 화백 유족이 서명한 진품 감정서가 제시됐지만 의혹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빨래터’는 법원으로 갔다. 재판부는 2009년 과학감정을 근거로 진품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천경자(88) 화백이 그린 ‘미인도’는 화가 본인이 “내 그림이 아니다”고 주장한 경우다. 1991년 천 화백은 위작임을 주장했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측이 그림 제작연도와 소장 경위를 추적해 진품이라고 맞섰고 이에 천 화백은 절필을 선언하기도 했다. 제주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변시지(86) 화백도 2006년 같은 경험을 했다. “경매로 1150만원에 팔린 풍경화 ‘제주풍경’은 내 작품이 아니다”고 주장했지만 진품감정서가 이미 발행된 후였다. 오현미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사는 “우리는 진품 감정의 역사가 짧아 유럽처럼 과학감정 시스템이 미술품 감정에 전문적으로 도입되거나 학문적으로 체계화돼 있지 않다”며 “전문인력 양성과 시스템 정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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