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독자는 서로 다른 주장 알 권리 있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59호 10면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左)는 2002년 자신이 편집장을 맡고 있던 위클리스탠더드 표지(中)에서 폴 크루그먼(右)을 미치광이 히피로 묘사했다.

논쟁의 출발점은 작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찰스 머리(Charles Murray)가 쓴 책 『양극화(Coming Apart)』다. 이 책에서 머리는 문화적으로, 지리적으로 미국이 점점 더 분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인구통계를 제시했다. 상위 20% 계층이 사는 지역에서는 이혼율이 낮고, 노동관이 철저하고, 종교의식을 잘 지키며, 혼외 출산도 거의 없다. 반면 하위 30% 계층이 사는 지역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논란이 된 건 그 원인에 대한 머리의 분석이다. 그는 백인 노동자 계급이 도덕적으로 부패하는 바람에 이런 현상이 벌어졌다고 했다. 양극화는 맞는데 경제가 아니라 도덕적 결함 때문이란 것이다.

自社 칼럼니스트 간 보혁 논쟁 신문에 싣는 뉴욕타임스

브룩스는 뉴욕타임스 1월 30일자에 실린 ‘거대한 단절(The Great Divorce)’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머리의 주장에 박수를 보냈다. 브룩스도 미국의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갖가지 현상과 수치를 인용했다. 상류 집단 백인 어린이의 7% 가량이 혼외 정사로 태어난 반면 하층 집단에서는 이 비율이 45%나 된다는 점, 그리고 상류 집단 30~49세 사이 거의 모든 남자가 직업이 있는 데 반해 하층 집단에서는 이 인구층에서 직업 있는 사람의 비율이 경기에 상관없이 꾸준히 하락해 왔다는 점 등이다. 그러면서 하층 집단 구성원이 전통적인 부르주아 규범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역시 경제적 불평등이 아닌 도덕적 부패를 양극화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이다.

열흘 후인 2월 9일 뉴욕타임스에는 크루그먼의 반박 칼럼이 실렸다. ‘돈과 도덕(Money and Morals)’이란 제목의 글이다. 크루그먼은 미국 사회의 양극화를 뒤처져 있는 미국인의 도덕적 실패 탓으로 돌리려는 시도를 배격해야 하며, 미국 노동계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변화들은 급격히 확대되는 (경제적) 불평등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크루그먼은 문제의 핵심으로 교육을 덜 받은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일자리가 급격히 줄었다는 점을 꼽았다. 교육을 덜 받은 사람들은 적절한 급여와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일자리를 잡기가 아주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보수 이론가’들은 하위 계층 사람들이 일자리를 덜 갖고 결혼도 덜 하게 됐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고 있다고 지적했다. 쉽게 말해 사회 문제를 개인 탓으로 돌린다는 얘기였다. 크루그먼이 지적한 보수 이론가가 브룩스라는 건 물어보나 마나였다.

MIT를 졸업하고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쳐온 크루그먼은 200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고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 경제학자다. 뉴욕타임스에는 1999년부터 경제 칼럼을 써 왔다. 그의 입장에선 빈곤 계층의 범죄나 혼외 출산의 증가가 도덕적 해이 때문이라는 주장은 ‘꼬리가 개를 흔든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같은 신문사 칼럼니스트인 브룩스와 크루그먼이 벌인 공방은 미국 지식인 사회에서 화제가 됐다. 미국 언론인 중 최고의 인터뷰어(interviewer) 중 하나로 평가받는 PBS의 찰리 로즈는 아예 두 사람을 자기 프로그램에 출연시켜 공개적으로 논쟁하게 했다.

또 뉴리퍼블릭이라는 잡지는 ‘왜 폴 크루그먼과 데이비드 브룩스는 서로를 증오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 잡지는 “두 사람의 적대감은 아마도 2002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당시 잡지 위클리스탠더드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미치광이 히피로 묘사하는 표지 기사를 내보냈는데, 표지 그림에 크루그먼이 포함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 잡지 표지 캐리커처에는 크루그먼과 비슷한 남자가 머리에 꽃을 꽂은 채 뉴욕타임스를 들고 있다. 당시 이 기사를 쓴 게 바로 그 잡지의 편집장이던 데이비드 브룩스였다. 크루그먼이나 뉴욕타임스가 모두 분개할 만한 대목이다.

브룩스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이런 공격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1961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브룩스는 시카고대 역사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월스트리트저널의 수석기자를 지냈다. 그가 편집장을 지낸 위클리스탠더드는 조지 W 부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낸 네오콘(신보수주의 강경파)의 집합소다.

하지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뉴욕타임스 경영진이다. 뉴욕타임스는 2003년 브룩스를 아예 칼럼니스트로 영입했다. 브룩스가 뉴욕타임스와 크루그먼에 대한 조롱 기사를 쓴 지 1년 뒤다. 브룩스는 뉴욕타임스에 와서도 자신의 보수적 입장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뉴욕타임스 지면을 통해 그런 주장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브룩스가 처음은 아니다. 뉴욕타임스는 닉슨 대통령의 연설 원고를 썼던 대표적 보수주의자 윌리엄 사파이어에게 무려 33년(1973년~2005년)간이나 칼럼을 쓰도록 했다. 이에 대한 뉴욕타임스의 입장은 “우리는 진보적 신문이다. 하지만 우리 독자는 보수 진영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신문과 방송들이 진영 논리에 빠져 반대 의견은 묵살하고 심지어 왜곡도 서슴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온다는 점을 고려하면 부러우면서도 뼈아픈 대목이다. 또 다른 진보 성향 신문사인 워싱턴포스트(WP)도 보수 성향 칼럼니스트인 로버트 노박의 칼럼을 정기적으로 싣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다른 생각을 함께 소개해주는 것이 ‘집단 극단화(group polarization·집단의 의견 양극화)’를 방지할 수 있는 안전장치라고 지적한다.
황용석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교수는 “최근 우리 언론은 한국 정당 정치 체제에서 특정 정파의 이해를 도모하거나 보호하는 일종의 ‘애완견 모델(lapdogs model)’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