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왕 박성호 작가 ‘고소왕’ 된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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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소설 작가 박성호(29)씨가 “매달 형사고소를 하느라 신작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하고 있다. [안성식 기자]

판타지 소설 분야에서 『신디케이트』 등 베스트셀러를 펴낸 작가 박성호(29)씨. 박씨는 최근 2년째 신작 소설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는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이면 수십 장의 고소장을 들고 서울 양천경찰서를 찾아간다. 지난달 접수한 형사고소 건수만 35건. 박씨가 창작활동을 접고 고소 건수가 300건 넘는 ‘고소왕’이 된 이유는 자신의 소설을 웹하드나 포털사이트 블로그에 불법 업로드하고 다운로드하는 네티즌들 때문이다. 그는 “한때 한 권당 2만 부씩 팔리고 월 수입도 1000만원이 넘었다”며 “이젠 신간이 나오면 바로 다음날 인터넷에 올라가기 때문에 생계 유지도 어렵다”고 말했다.

 폭넓은 독자층을 갖고 있는 판타지·무협 등 장르소설계가 불법 업로드 때문에 고사(枯死) 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다. 박씨처럼 사실상 절필을 하고 고소에 매달리는 작가가 줄을 잇고 있다. 한국대중문학작가협회(한문협)에 따르면 지난 1월 저작권 관련 고소를 한 작가는 120명으로 고소 건수만 1339건에 이른다. 한 작가는 지난달 123건의 고소를 했다. 한문협 소속 작가들은 매일 같이 인터넷에 들어가 불법 업로드 채증(캡처) 자료를 확보한 뒤 고소장에 첨부해 경찰에 제출하고 있다.

한 웹하드에 불법 업로드된 오채지(필명·41) 작가의 대표작 『혈기수라』가 텍스트 파일과 함께 올려져 있다.

 판타지 소설 『프라우슈 폰 진』을 펴낸 김광수(39)씨는 “30권짜리 신작이 발매됐는데 다음날 웹하드에서 텍스트파일로 바뀌어 권당 70원에 팔리는 것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아이가 셋인데 인세라도 받기 위해 죽기살기로 한 달에 2권씩 책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달 100건의 형사소송을 제기했고 30건의 민사소송이 진행 중이다.

 데뷔 8년차인 작가 장모(40)씨는 최근 은퇴를 선언하고 한 병원에 경비원으로 취직했다. 7년 동안 꾸준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40권 이상 소설을 냈지만 최근 수입이 100만원 미만으로 줄었다고 한다. 출판업계 관계자는 “판매 부수 자체가 감소하다보니 10년 전에 비해 중견작가들의 인세가 50~75%정도 깎였고, 신진 작가들에겐 권당 20만~30만원만 주고 있다”며 “작가층이 얇아지고 질 좋은 작품 찾기도 어려워지는 등 악순환이 계속된다”고 말했다.

 1980년대 인기 무협소설 작가였던 한문협 회장 금강(필명·본명 김환철·56)씨는 “불법 업로드를 하는 사람의 40% 이상이 중·고등학생으로 ‘몰랐다’ ‘그거 팔아서 몇천원밖에 못 벌었다’며 선처를 호소하곤 한다” 고 말했다. 그는 “일부 네티즌들이 12만원을 주고 사야 하는 소설 15권을 파일 하나로 모아 20원에 팔고 있다. 소설의 경우 영화나 음악보다 작가가 받는 타격이 심하다”고 덧붙였다.

 명지대 김석환(문예창작과) 교수는 “작가들이 사라지면 독자는 좋은 작품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라며 “‘제2의 해리포터’ 같은 작품을 꿈꾸는 작가와 저작권에 대한 보호를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지상 기자

◆장르소설=무협·SF·판타지·추리·호러·로맨스 등을 말한다. 예전에 ‘대중소설’로 통칭되던 소설의 하위 장르들을 두루 포괄해 지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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