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42) 물 건너 간 ‘64조+ 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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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공적자금은 DJ 정권 내내 ‘뜨거운 감자’였다. 집권 초기엔 모자라 쩔쩔맸고, 중반기부턴 “돈을 헤프게 썼다”며 정치공방이 벌어졌다. 2001년 1월 19일 국회에서 열린 ‘공적자금 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한 전·현직 경제 수장들. 왼쪽부터 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 이근영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진념 당시 재경부 장관, 강봉균 전 재경부 장관. [중앙포토]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두고 수첩 공주라고 하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도 못지 않았다. 그는 꼼꼼한 성격이었다. 항상 노트를 지니고 다녔다. 점검하고 지시할 내용을 직접 정리한 노트였다. 그는 밑에서 적어준 대로 읽는 법이 없었다. 노트를 보며 염두에 뒀던 말을 덧붙이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시나리오가 어긋난 것은. 1999년 3월 29일, 여의도 금융감독위원회 대회의실. 국정 개혁 보고를 받던 DJ는 난데없이 윤원배 부위원장을 지목해 물었다.

 “윤원배 부위원장께 질문하겠습니다. 정부가 금융 구조조정에 64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했습니다. 이것이 부족할 것이다, 하는 얘기가 국내외에서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두가 숨을 죽였다. 질문 내용은 각본대로였다. 그런데 질문 대상이 틀렸다. 예정대로라면 이용근 상임위원에게 물어야 했다. 난데없는 질문에 윤 부위원장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64조원이면 어느 정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공적자금을 더 투입해야 할 상황은 맞지만 부실 채권을 판 자금을 다시 투입할 수도 있습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실무자들이 구겨진 표정으로 땀을 닦았다. ‘망했다…’ 하고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 질문은 공적자금 추가 조성을 위해 마련한 일종의 각본이었다. DJ가 추가 공적자금의 필요성을 물으면 이용근 상임위원이 “그렇다. 필요하다”고 답하기로 짜놓았다. 자연스레 정치권이 논의를 이어간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DJ의 ‘오발’로 차질을 빚은 것이다. 각본에 없는 질문을 받은 윤 부위원장은 ‘개인적인 생각을 묻나 보다’ 하고 자유롭게 답변했다고 한다.

 이날 회의는 케이블 TV로 생방송됐다. 국민들 앞에서 정부가 “추가 공적자금은 필요없다”는 선언을 한 셈이 됐다. 그렇게 공적자금 추가 조성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한국 경제가 말라가던 때였다. 마른 논 물 삼키듯 공적자금이 사라졌다. 이후 1년 반 동안, DJ 정권은 공적자금 부족으로 허덕였다. 돌이켜보면 출발부터 너무 빠듯했다.

 1998년 5월에 확정된 1차 공적자금은 64조원이었다. 이 숫자를 처음 들고 나온 건 재정경제부의 의뢰를 받은 한국개발연구원(KDI)이다. 어떻게 계산했느냐. 어찌 보면 주먹구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금융 부실을 메우는 데 쓸 돈이 공적자금이다. 앞으로 금융 부실이 얼마나 늘어날지를 그때 어떻게 예측하겠는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기업이 쓰러져가던 때, 바닥이 어디인지 짐작도 되지 않던 때였다. 98년 3월까지 확정된 부실 채권 규모가 47조원. KDI는 여기에 2를 곱해 100조원이란 숫자를 산출했다. 향후 부실이 100조원 수준으로 불어날 걸로 추산한 것이다. 금융회사가 자구노력으로 절반을 메운다고 생각해 50조원 정도만 정부가 조성하자는 주장이었다. 거기에 이미 조성돼 투입됐던 자금 14조원을 더한 게 64조원이란 숫자의 등장 배경이었다.

 금감위 자문관을 맡았던 최범수 현 신한금융지주 부사장이 당시 KDI에서 공적자금 규모를 추산한 금융팀의 일원이었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 “공적자금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묻는 건 화재 현장에서 ‘불을 끄려면 물이 몇 L나 필요하겠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불이 얼마나 번질지 누가 알겠는가. 한 가지 분명한 건 화재 진압을 빨리 시작할수록 물이 적게 든다는 거다. 공적자금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투입할수록 적게 든다.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64조원. 관계 장관들은 이를 통과시켰다. 일각에선 “어림도 없다”고 지적했다. 부실이 100조원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란 주장이었다. 한국금융연구원과 한국경제연구원, 세계은행이 모두 “한국 부실 규모는 최소 200조원일 것”이라고 내다보던 때다. 공적자금도 최소 100조원은 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하지만 경제 관료들은 아니었다. 물론 나도 아니었다. 공적자금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결국은 대기업 부실을 청소해 주는 돈이다. 가장 중요한 건 자구노력이다. 팔 건 팔고, 끌어올 건 끌어오고, 정말 어떻게 해도 메워지지 않는 최소한의 구멍만 공적자금으로 메워야 한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전망이 너무 엇나간 게 문제였다. 이듬해 8월에 워크아웃에 들어간 대우그룹 하나에만 30조원 가까운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2000년 이후 현대그룹에 들어간 공적자금도 10조원을 넘겼다. 하긴 그때만 해도 5대 그룹 중 하나가 쓰러질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공적자금이 목말랐으면서도 2000년 초,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간 나는 입장을 바꾼다. 공식회의 석상에서 DJ에게 “계속 공적자금을 투입하다간 모럴 헤저드(도덕적 해이)가 생깁니다. 농업계도 의료계도 손을 벌릴 겁니다” 하고 추가 공적자금 조성에 반대했다. 때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우가 쓰러진 직후였다. 투자신탁회사들이 “대우채 때문에 망하게 생겼다”며 정부에 손을 벌렸다. 투신사뿐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공적자금 타령을 했다. 언론에선 공적자금이 ‘공짜 자금’이 됐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이럴 때 공적자금을 더 늘려놓으면 아우성이 얼마나 심해질지, 듣지 않아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 공적자금 추가 조성을 내가 언급한 건 8월 초였다. 시장의 아우성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다. 2차 금융노조 파업을 무마하고 나니 DJ가 “수고했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이제는 공적자금 추가 조성을 검토할 때가 됐습니다. 운을 떼어놓으셔야겠습니다.” 이미 내가 경질될 거란 걸 알던 시점이었다. 며칠 뒤 예정대로 개각이 있었다. 후임 진념 재경부 장관 내정자는 내정 발표 직후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추가 공적자금 조성을 검토하겠습니다.”

▶윤원배(66)

중경회(김대중 경제를 생각하는 모임) 핵심 멤버. 숙대 경제학과 교수로 1998년 금융감독위원회 출범 때 초대 부위원장이 됐다. 99년 5월 말 포르투갈에서 열린 ‘국제증권위원회 연차총회’에 참석차 출국했다가 전격 교체됐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현 숙명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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