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195> 정당 이름의 변천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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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한나라당의 새 이름, ‘새누리당’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습니다. “특정교회 이름을 연상시킨다” “유치원 이름 같다”는 겁니다. “개 이름 아니냐”는 논란까지 당 안에서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집권여당 이름치고는 권위가 안 선다는 얘깁니다. 새누리당은 당초 ‘선진, 민주, 자유, 정의’ 같은 한자어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게 원칙이었습니다. 새 출발을 하는 데는 한자어보다 우리말을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의 상황을 만난 셈입니다. 이젠 왕도가 없습니다. 귀와 입에 익숙해지는 것 말고는. 지금부터 소개해 드릴 당명사(黨名史)를 보시면 이해하실 겁니다.

양원보 기자

1987년 이후 선관위 등록 정당 113개

대한민국 정당명사(史)에서 그나마 뿌리가 깊은 당명은 ‘민주당’이다. 1960년대 이후 줄곧 명맥을 유지해왔다. 왼쪽부터 1987년 통일민주당 현판식, 1991년 민주당 현판식, 2000년 새천년민주당 현판식.

1987년 민주화 이후 중앙선관위에 등록된 정당은 모두 113개다. 국회의원을 한 명이라도 보유했던 정당만 따져도 40개다. 선거 때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정당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여야 1, 2당들까지 이미지 쇄신을 위해 당 간판을 떼었다 붙었다 하다 보니 생겨난 결과다.

특히 역대 집권자들은 예외 없이 ‘대통령 당(黨)’을 만들었다. 자신들의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정당을 새로 만들거나 멀쩡한 당을 리모델링했다. 민주공화당(박정희 전 대통령), 민주정의당(전두환 전 대통령), 민주자유당(노태우 전 대통령), 신한국당(김영삼 전 대통령), 새천년민주당(김대중 전 대통령), 열린우리당(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렇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단히 예외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18대 총선 공천을 통해 한나라당을 ‘이명박계’가 장악하도록 했다는 점에 비춰보면 이 대통령 역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볼 수도 없다.

자주 사용된 당명, 민주·국민·통일·자유·한국…

역대 대통령들은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끊임없이 ‘대통령당’을 만들었다. 사진은 박정희·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선 포스터.

이런 113개의 당명으로 가장 자주 사용된 어휘는 단연 ‘민주’다. ‘국민’ ‘통일’ ‘자유’ ‘한국’ ‘공화’ ‘신민’ ‘정의’ ‘미래’ ‘민족’도 많이 쓰였다. 정당들의 부침이 워낙 심하다 보니 나중엔 그럴듯한 당명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게 자유민주연합, 미래연합 같은 ‘연합’이나 국민통합21 같은 숫자를 조합한 당명이었다. 제한된 단어를 갖고 조합을 반복하다 보니 정당 이름에서 철학이나 이념적 지향을 찾는 것도 어렵게 돼 버렸다.

그런 와중에도 장수한 당명은 민주공화당이다. 1963년 생겨나 80년 신군부에 의해 해산될 때까지 17년 7개월 동안 존속했다. 현재까지 최장수다. 이후 ‘박정희 후계자’를 자처했던 김종필 전 총리가 87년 10월 30일 “민주공화당의 빛나는 이념과 전통을 계승하겠다”며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지만 90년 2월 민주자유당·통일민주당과 3당 합당을 이루면서 다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정치권에서 역사성을 갖는 당명은 ‘민주당’이다. 통일·평화·신한 등 수식어가 붙은 것에서부터 ‘민주당’이라는 단독 명칭까지 포함해 60년대 이후 줄곧 명맥을 유지해왔다.

야당이 즐겨 사용해왔다는 특징도 있다.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다. 60년대엔 민주당이 두 번 생성과 소멸을 거듭했고 70년대 신민당을 거쳐 80년대에 신한민주당(85~88년)·통일민주당(87~90년)·평화민주당(87~91년) 등으로 거듭났다. 90년대에는 ‘꼬마 민주당’과 민주당(91~95년)이 자리했고 2000년대엔 ‘새천년 민주당’이란 이름으로 부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란 이름에 대한 애착이 큰 역할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새천년 민주당 창당시 당의 법통(法統)을 “자유당 치하에서 창립되고 4·19 이후 집권한 민주당(제2공화국)의 맥을 이은 50년 민주정통의 정당”으로 규정한 적이 있다. 민주당 정권의 장면 전 총리를 정치·신앙적 대부(代父)로 삼았던 그는 ‘민주당’이란 명칭에 그만큼 애착을 갖고 있던 것이다. 지난해 연말 시민통합당과 통합 협상을 벌였던 민주당 측이 당명을 정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민주’는 들어가야 한다”고 버텼던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그래서 통합정당인 민주통합당의 공식 약칭은 여전히 민주당이다.

새누리당만큼이나 논란을 낳은 이름들도 많다. 대표적인 게 2004년 열린우리당이다. 당명에 정치적 이념이나 가치를 표현하는 한자어가 빠져 파격적이란 평가가 많았지만 그만큼 내부 반발도 심했다. 개방성을 뜻하는 ‘열린’과 다소 폐쇄적인 ‘우리’라는 개념이 서로 충돌해 모순적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열린우리당 ‘열우당’ 약칭 논란에 속앓이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약칭 때문에 생겨났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열우당, 열당, 열린당’으로 불렀다. “공식 약칭인 ‘우리당’으로 부르면 우리당(한나라당)과 구분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열등한 당’이란 뜻에서 일부러 비아냥거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일각에선 아예 “뚜껑열린당”이란 조소까지 보냈다. 당시 열린우리당은 아무리 ‘우리당’으로 불러달라고 해도 잘 먹히지 않자 당 홈페이지에 신고센터까지 두기도 했다.

2007년 8월 열린우리당에서 간판만 바꿔 단 대통합민주신당도 약칭 때문에 고생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예 약칭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언론에서 ‘민주신당’으로 통했던 대통합민주신당은 법원이 민주당에서 낸 유사 당명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면서 ‘여권신당’ ‘대통합신당’ 등 온갖 이름으로 불렸다. 하는 수 없이 당 지도부는 7음절이나 되는 ‘풀 네임’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대선 패배 후 2달여 만인 2008년 2월 대통합민주신당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오명으로 얼룩진 당명사는 ‘친박연대’에 와서 절정을 이룬다.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박근혜계’ 정치인들은 부랴부랴 당을 조직했다. 일부는 무소속 연대를 택했고 또 다른 일부는 당을 만들었다. 그게 친박연대였다. 특정인의 이름을 상징하는 당명이 등장한 건 헌정사상 최초였다.

중앙선관위는 “특정인을 연상시킬 수 있는 문구를 정당 명칭에 사용하는 것은 사회 통념에 비춰볼 때 바람직하지 않지만 유사 명칭 사용을 금지하는 정당법 41조 규정 외에는 당명과 관련된 명시적 제한이 없다”며 당명 사용을 허락했다. 당 안팎에선 “한국 정치 수준을 후퇴시키는 블랙 코미디”라고 비판했지만 지역구 6석을 포함해 14석을 챙기면서 논란을 잠재웠다.

민주공화당에 이어 헌정사상 두 번째 최장수 정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이미 2004년에 당명 개정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2002년 대선자금 불법 모금으로 ‘차떼기 당’이란 오명이 드리워졌던 탓이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 탄핵으로 정국이 요동을 치자 “창당 수준의 개혁을 해야 한다”며 당명 변경을 검토했다가 박근혜 대표체제로 전환한 뒤 총선에서 121석을 건지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미국 민주당 182년, 공화당 158년 간판 유지 … 과거 단절용 당명 개정 없어

당명 변경 외국에선

미국 민주·공화당은 150년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4년 공화당이 국가연맹당으로 잠시 개명했던 것을 빼면 당명을 바꾼 일은 없었다. 사진은 민주당의 상징인 당나귀상(왼쪽)과 공화당 상징인 코끼리상. [중앙포토]

우리나라의 잦은 당명 변경은 ‘해외토픽’이 되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넷판은 3일(현지시간) 새누리당 당명 개정 논란과 관련, “당명 개정이 과거엔 새로운 정치 지도자의 지배력 장악을 알리는 신호였지만 최근 10년간은 인기를 잃은 정당이 과거와의 단절을 위한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다”며 “한국에서 이는 흔한 일”이라고 보도했다. 한마디로 자기들 상식으론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투였다.

미국 정당사를 보면 그럴 말이 나올 만도 하다. 미국 정당의 역사는 1800년 창당한 민주공화당부터 시작된다. 헌법을 기초하고 제3대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이 창당했다. 지금 민주당의 전신이다.

‘공화’란 이름이 떨어져 나간 게 1830년이니까 민주당 간판을 내건 시간만 따져도 182년에 이른다.

공화당도 장수하고 있다. 1854년 노예제를 확장하는 내용의 캔자스네브래스카법안에 반대하는 휘그당과 자유토지당이 중심이 돼 결성했다. 158년 역사다. 공화당은 한때 국가연맹당(National Union Party)으로 간판을 바꿨던 적이 있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4년 연임에 도전한 링컨 대통령에 의해서다. 나라가 반으로 쪼개질 위기에서 국가적 통합을 강조하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었던 셈이다. 최소한 우리처럼 과거와의 단절을 위해 당명 개정을 시도하진 않았다.

‘의회정치의 시조’인 영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보수당은 1912년에 창당됐다. 기원은 1678년 찰스 2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공업자들의 이익을 대변한 휘그(Whig)에 맞서 토지를 소유한 귀족 계급을 대표했던 토리(Tory)가 보수당의 본류다. 1900년 노동대표위원회 형태로 결성됐던 노동당(1906년부터 사용)도 112년 간 명맥을 잇고 있다.

당명에서만큼은 일본에 비해서도 후진적이다. 제1야당인 자유민주당은 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현재의 이름을 얻고 57년의 긴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숱한 정계개편과 이합집산, 두 번의 정권교체가 있었지만 55년간 흔들림 없이 정권을 잡는 저력을 보였다.

대만 국민당도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중국 건국의 아버지인 쑨원(孫文)은 1919년 중화혁명당을 개조해 국민당을 세웠다. 1949년 중국 공산당에 쫓겨 본토에서 대만으로 건너온 이후에도 타이베이(臺北)를 중심으로 한 북부를 기반으로 50년 넘게 집권하고 있다. 제1야당인 민진당도 1986년 창당 이래 26년간 단 한 번의 당명 개정도 없이 수권야당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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