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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맞수 … 박희태 사퇴한 날 박상천도 불출마 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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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93년 재선 의원 박상천·박희태 1993년 14대 국회 정치특위에서 같은 재선 의원이자 여야 간사로 만났던 박희태 국회의장(오른쪽)과 박상천 상임고문이 안기부법 개정안을 놓고 절충안을 마련하는 모습. 당시 박 의장은 정치특위의 민자당 간사였고, 박 고문은 민주당 간사였다. [연합뉴스]

9일 오전 10시 국회 기자회견장. 한종태 국회 대변인이 박희태 국회의장의 의장직 사퇴문을 읽었다. “제가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고 감사드립니다.”

 20분 뒤 같은 회견장에 민주통합당 박상천 상임고문이 섰다. “이제 나이가 많아져 19대 총선 불출마를 결심했습니다. 오랜 세월 저를 지지해주신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1980년대 후반 이래 20여 년 동안 정치권의 ‘영원한 맞수’로 불리던 두 사람이 9일 정치권에서 동시에 퇴장했다. 한 사람은 불명예 퇴진, 다른 한 사람은 자발적인 퇴장이지만, 두 사람의 각별한 인연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 셈이다. 고향은 영남(경남 남해·박희태)과 호남(전남 고흥·박상천)으로 달랐지만 두 사람은 닮은 점이 많다. 밀양 박씨에, 1938년생 동갑내기에, 서울대 법대 동기동창이다. 고등고시 사법과 13회에 나란히 합격한 뒤 법무부 장관을 지낸 것도 똑같다. 박 의장은 과거 “대학 시절 박상천이 나보다 공부를 잘했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검찰에선 박 의장이 고등검사장까지 올랐고, 박 고문은 검사장 직급에 오르지 못했다.

 두 사람은 1988년 13대 총선을 통해 국회에서 다시 만났다. 박 의장은 민주정의당, 박 고문은 평화민주당 소속이었다. 90년대 초반 두 사람은 여야의 대변인을 맡아 촌철살인의 논평으로 대결을 벌였다. ‘영원한 맞수’ ‘숙명의 라이벌’이란 말이 이때 생겨났다. 박 의장은 대변인 시절 바둑에서 착안해 ‘정치 9단’이란 단어를 만들어냈을 정도의 조어(造語) 능력과 유머가 돋보였다. 박 고문은 탁월한 논리력과 15초 안에 속사포처럼 터지는 단문(短文)의 논평으로 유명했다.

 두 사람은 90년대 TV 대담 프로그램에 나와 서로를 평가한 적이 있다. 박 고문은 “박희태 대변인의 대중 속에 파고드는 교묘한 재치를 당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박 의장은 “가끔 내가 (논평 싸움에서) 이길 때는 이겨서 기분이 좋고, 내가 지면 박상천 대변인이 빛나니까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이후 두 사람은 정권이 바뀐 뒤에도 관운(官運)을 이어갔다. 박 의장은 김영삼(YS)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과 원내총무, 이명박 정부에서 한나라당 대표와 국회의장을 지냈다. 박 고문은 김대중(DJ)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과 원내총무, 노무현 정부에서 새천년민주당 대표 등을 지냈다. 박 의장은 6선, 박 고문은 5선을 기록했다. 각각 YS·DJ의 핵심측근으로 자리 잡다 보니 종종 ‘앙숙’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박 의장은 “한 번도 박상천 의원을 인신공격한 적은 없다”고 했고, 박 고문도 “늘 박희태 의원을 존중하려고 애썼다”고 했다.

 24년 정치역정을 불명예스럽게 마무리한 박 의장은 9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박 고문은 이날 “더 이상 불출마 선언을 늦출 수 없어서 오늘 발표했는데, 우연히 (박 의장 사퇴와) 일치했다”며 “나야 박 의장이 명예롭게 의장직을 수행하다 마감하기를 바라지만, 본인이 여러 사태를 감안해서 결정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곧 (박 의장과) 만나서 어떻게 살아갈지 얘기도 하고, 남은 인생계획도 함께 의논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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