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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보이스피싱’ 당해 보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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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기택
시인

악명 높은 ‘보이시피싱’이 드디어 내 휴대전화에도 왔다. 전화 속의 남자 목소리는 다짜고짜 아이 세 명을 지하실에 데리고 있으며 그중에 내 아이도 있다는 말을 한 후에 바로 아이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아빠, 지금 잡혀 있으니 빨리 구해줘.” 아이 목소리는 애처롭게 울먹이며 도움을 청했다. 보이스피싱일 거라고 의심했던 나는 그 목소리가 내 아이 목소리와 똑같다는 데 놀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내 아이가 납치되었다고 생각하니 다리의 힘이 풀리고 뻣뻣했던 내 목소리는 저절로 고분고분해졌다.

 아이가 진짜 납치된 것인지 확인하지 못하도록 전화 속의 목소리는 절대로 전화를 끊지 말 것과 자신이 시키는 대로만 할 것을 지시하며 위협했다. 전화를 끊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나는 보이지 않는 손에 단단히 멱살 잡힌 꼴이 되었다. 아이가 납치되었을 가능성과 아직 납치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손과 발은 유령의 손아귀에 붙들린 채 은행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사정이 있으니 빨리 천만원을 송금하라는 수법이 내가 그동안 들었던 보이스피싱 수법과 너무 닮아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은행으로 가면서 주변 사람에게 집 전화와 아이 엄마의 번호를 적어 주고 전화해 달라고 부탁했다. 안타깝게도 통화는 되지 않았고, 그때마다 전화 속의 목소리는 나에게 무엇을 하는 중인지 누구와 어떤 대화를 했는지 추궁했다.

 내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통화하는 등 수상한 행동을 하는 걸 보고 보이스피싱이 들켰다고 생각했는지 상대방은 도중에 전화를 끊었다. 아이와 통화해 보니 아무 일 없이 집에 잘 있다고 했다.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허무와 환멸과 치욕이 합쳐진 것 같은 피로감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돈을 보내지 않았으므로 당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보이스피싱이 주는 굴욕감을 온전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빨리 구해 달라는 애처로운 아이 목소리는 귓가에서 계속 생생하게 맴돌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내가 겪은 것과 같은 사기를 당한 사람들이 주변에 의외로 많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천여만원을 보냈다는 사람도 있었고 오천만원을 보냈다는 사람도 있었다. 돈을 빌려 송금한 후 아직도 그 빚을 갚고 있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주변에 말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만 있었다. 그 얘기를 하면 겨우 아물었던 마음의 상처가 다시 도질까 봐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우리가 함께 웃고 떠드는 동안 속으로는 우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는 그 수많은 대화와 웃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겉으로만 웃고 떠드는 그 만남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일을 겪기 전에 나는 보이스피싱이 온다 해도 당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인터넷에 있는 나에 대한 기본 정보를 빼내고 거기다 내 불안한 심리를 더해서 이용하면 내 자신감이라는 게 얼마나 쉽게 허물어지는지 단번에 드러나고 말았다. 아이 목소리를 도용해 조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기술이 아닐 것이다. 인터넷 뱅킹, 폰뱅킹을 이용하니 얼마나 쉽고 빠른가. 잘 준비된 범죄자들은 눈뜬 장님이나 다름없는 피해자들이 허둥대며 돈을 갖다 바치는 걸 보고 얼마나 비웃을까. 그들은 정보통신 기술의 그물망에 숨어서 손을 쓰지 않고 소매치기하고 있다. 정보통신 기술이 혁신적으로 바꾸어 놓은 편리한 정보화 사회가 이 새로운 유령을 만든 것이다.

 보이스피싱은 마음이 일으키는 허상을 실제로 알고 두려워하거나 안달하는 내 꼴불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나 학원 이름 같은 한두 가지 사실만 확인했어도 이 허상은 그 자리에서 바로 깨졌을 것이다. 금융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보이스피싱 피해는 8000여 건에 1000억원이 넘었다고 한다. 한 해 전에 비해 크게 늘어난 수치라고 한다. 이 범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실질적인 대책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러나 내 안의 불안이나 욕망이 그 범죄에 협조하고 있는 건 아닌지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태도와 지혜도 필요할 것이다.

김기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