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2차 구조조정에 떨고 있는 기업들

중앙일보

입력

금융감독원 A국장은 25일 하루종일 전화 공세에 시달렸다.

기업체에 근무하는 친구나 선·후배로부터 “부실징후 기업의 기준이 뭐냐”
“업종별 편차는 어떻게 산정하느냐”
“영업이익으로 빚을 못갚으면 무조건 문을 닫아야 하느냐”는 등의 전화가 빗발쳤다.

A국장은 “금융감독당국은 기본적인 지침과 모형만 정하고 세부적인 회생·퇴출 심사는 채권단이 결정한다”면서 “기업들의 위기감이 극에 달해 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정부가 다음달부터 신용을 점검해 존속기업과 퇴출기업을 다시 판정하는 2단계 기업 구조조정에 들어가기로 함에 따라 재계에 비상이 걸렸다.

5백여개 법정관리·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화의 기업들은 퇴출 대상에 들어갈까봐 긴장하고 있으며,대기업들도 계열사의 영업이익과 부채비율을 다시 점검하는 등 바삐 움직이고 있다.

H기업 재무팀장은 “회사채 차환(借換)발행은 물론 신규 발행도 어려워 자금 마련에 정신이 없는 판에 퇴출 걱정까지 하게 됐다”면서 “로비력이나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 퇴출 여부가 결정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에 대비하는 대기업들=현대는 2차 구조조정 대상에 오를 만한 기업이 없다면서도 현대건설과 현대투신증권이 거론될 가능성에 대비해 이를 사전 봉쇄하려는 움직임이다.

현대건설 김윤규 사장은 “밖에서 우려하는 것과 달리 현재 영업상 이익을 내고 있다”며 “연말까지 자구안대로 부채 1조5천억원을 줄여 4조원대를 유지하면 문제될 게 없다”고 말했다.현대투신도 다음달 미국의 금융그룹 AIG로부터 10억달러(약 11조원)의 외자유치 계약을 체결할 예정이어서 퇴출 대상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코오롱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진행해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면서도 코오롱개발의 경영이 어려워 걱정하고 있다.코오롱개발은 보유 부동산을 따로 떼내 매각하고 외자를 유치하기 위해 노력 중이며,연말까지 결론내겠다고 밝혔다.

지난주 쌍용양회가 일본 태평양시멘트로부터 외자를 유치한 쌍용그룹은 구조조정에 속도를 더하기로 했다.쌍용정보통신 지분을 팔아 올해안에 7천억원 정도의 자금을 확보하고 서울 삼각지 그룹사옥 부지·인천 물류기지 등 부동산을 매각해 4천억원을 마련할 계획이다.

효성·동양·현대자동차 그룹 등은 계열사의 영업실적이 괜찮고 부채비율도 양호해 퇴출대상 업체가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전전긍긍하는 한계기업=영업이익으로 금융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기업들 중 일부는 퇴출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올 상반기 적자를 낸 D사 전무는 “지난해 투자를 많이 한데다 올해 업종이 불황이어서 적자를 냈다”면서 “내년부터는 장사가 잘 될 것으로 보는데 이번에 퇴출기업에 들어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했다.

E사 자금부장은 “정부 발표 이후 직원들이 일손을 잡지 못하고 있다”면서 “자금사정이 어렵더라도 장래성이 있는 기업은 정부가 과감히 지원하겠다고 했으니 이 말을 믿는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태째 워크아웃이 진행중인 J사 관계자는 “임직원들이 임금을 삭감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뛰었으나 업종이 불황인데다 부동산마저 팔리지 않아 눈에 띨만큼 실적을 호전시키지 못했다”면서 “퇴출대상에 끼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선별작업은 신속하고 투명하게=재계는 금융당국이 기준을 분명히 정해 그 요건에 미치지 못하는 기업을 퇴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퇴출기업 선정과정이 최대한 투명해야 하며,경제외적인 고려에 따라 빠지는 경우가 있어선 안된다고 입을 모았다.

O사 사장은 “98년 부실기업에 대한 살생부를 작성했을 때 대기업의 상당수 계열사들이 정치권에 로비해 빠졌다는 소문이 나돌았다”면서 “퇴출당하는 기업과 오너가 수긍할 수 있도록 투명한 절차에 따라 퇴출작업이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S사 전무는 “금융당국과 채권은행단이 이미 부실징후기업들을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이왕 발표한 것이면 빨리 해야 하며,시간을 끌 경우 이런저런 소문이 나돌 것이고 엉뚱한 기업이 피해를 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H그룹 재무팀장(전무)는 “기업과 오래 거래해온 은행들이 제대로 된 수치로 퇴출기업을 선정할 수 있을 지 의문”이라면서 “은행과 기업의 ‘물밑거래’나 결탁을 막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계는 특히 기업의 미래가치나 성장성 등을 감안하지 않고 퇴출기업을 선정할 경우 소송사태가 생길 것이라고 지적했다.

◇업종·산업별 편차를 고려해야=재계는 퇴출 판정 기준을 정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으로 업종별 특성을 들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업종의 성격에 따라 설비·장비 등을 리스하는 경우가 많거나 외상 구매가 많은 경우 부채비율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면서 “이런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반적인 기준으로 처리하면 장기 불황을 맞고 있는 건설업체는 상당수가 퇴출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12월 결산 상장사 중 관리종목 등을 제외한 3백96개사 가운데 올 상반기 영업이익이 적자를 기록한 곳은 79개사로 전체의 20%에 달했다.특히 건설·섬유·정유·조립금속·의료정밀산업의 영업이익이 부진해 이들 업종이 대거 퇴출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대한건설협회 박진원 실장은 “지난해말 현재 일반 건설업체 평균 부채비율이 6백5%로 제조업(2백14%)의 3배 가까이 된다”며 “퇴출 기업을 정할 때 선(先)투자가 많아 불리하게 돼있는 재무구조를 정부나 채권단이 어느 정도 인정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LG건설 박준원 상무는 “다른 업종과 같은 잣대로 건설업종의 퇴출기업을 정한다면 살아남을 회사가 과연 몇개나 되겠느냐”며 “업종별로 특성을 고려한 기준을 만들어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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