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정가제가 흔들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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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진행되고 있는 도서 정가제의 완전 붕괴, 그 이후의 상황은 예측하기 힘들다.

단 최악의 경우를 가상한다면, 전국 3천5백여 서점들의 연쇄도산, 덤핑경쟁 온라인 서점들의 동반 붕괴 등 걷잡을 수 없는 상황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 최악의 가상 시나리오〓가상 시나리오의 첫 단추는 우선 교보문고. 이미 출판계에 암시를 준 ''통첩'' 대로 온라인 서점 ''교보북스'' 가 할인판매를 할 경우 영풍 종로 등의 온라인서점들도 이 대열에 참여할 수 밖에 없다.

이 경우 대부분의 기존 오프라인 서점들 역시 판매격감 속에 할인경쟁에 나설 수 밖에 없고 결국 전국의 소형매장과 거래 해온 도매업체들은 대량 반품사태 속에 ''대붕괴'' 를 반복하게 될 것이란 얘기다. 도서유통망의 폐허화다.

◇ ''시장논리'' 와 책의 사이〓출판계 모두가 ''최악의 시나리오'' 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유있는 몇몇 메이저 출판사들은 할인판매 경쟁과 정가제 붕괴, 그 이후를 크게 우려하지 않는다. 다양한 유통 방식이 새로 나오면 나왔지 별다르게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다는 느긋함이다.

그러나 이들도 인정하는 것은 책이 공산품과 구분되는 공공재(公共財) 적 성격을 가졌고, ''깨지기 쉬운 그릇'' 이라는 점이다.

바로 그 때문에 프랑스.일본.독일 등 선진국에서 이미 10년전 도서정가제를 법제화했고, 한국 역시 이 관련 법률안 ''출판진흥법'' 이 논란 끝에 입법예고가 된 것이다.

◇ 소비자 중심주의의 입장〓수요자 중심, 시장 중심주의를 내세우며 책 역시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특히 일반독자들이 그렇다.

그러나 신중론자들은 ''전형적인 다품종 소량생산품'' 인 책이 독자성에 충분히 눈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권의 책은 그 자체가 바로 브랜드며 함량과 정가가 천차만별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특히 정가제가 흔들리면 지식사회 콘텐츠인 고급 양서는 따라서 자취를 감출 수 밖에 없다고 우려한다.

그런 입장의 핵심 이론가인 김언호(한국출판인회의 대표) 씨는 이렇게 말한다.

"도무지 책 없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책방 한번 가보지 않고, 책 한권 읽지 않고 허울만 그러싸한 지식기반 사회구축이 가능한가. 지금이야말로 책문화의 인프라 구축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

◇ 업친데 덮친 상황〓올들어 공격적인 마케팅 활동을 시작한 온라인 서점들이 도서정가제를 벼랑에 몰고 있다.

예스24, 알라딘, 여기에 다시 뛰어든 인터파크의 공세는 20-80% 할인율을 무기로 삼고 있다. 카르푸, E마트, 프라이스클럽 같은 대형할인 매장도 할인판매를 시작한지 오래다.

물론 이들은 아동서.베스트셀러 위주이고 따라서 품목이 한정되지만, ''깍아주는 맛'' 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서점을 외면하고 있다. 가뜩이나 불황인 출판계는 업친데 덥친 상황이다.

지난해 초 5천여개 였던 전국의 서점들은 현재 3천5백여개 정도로 줄었다고 출판계는 추산한다.

책 유통의 실핏줄로 비유되는 서점들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상황속에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은 결국 공존해야 한다는 점은 도외시되고 있다.

◇ 싼게 비지떡〓무엇보다 정가제의 붕괴는 공급과 소비 양쪽에서 모두 악순환을 반복할 것이란 우려가 높다. 출판사들은 양질의 책은 내려하지 않을 것이다.

품만 들고 제 값 받고 팔기도 힘든 양질의 책은 내려하지 않을 것이고, 소비자들은 싼 책에만 손이 갈 것이란 얘기다.

출판사들이 눈속임 가격책정을 할 가능성도 매우 높다. 할인된 가격인 8천원을 받을 것을 가정해 책 가격을 1만원 붙인다면 소비자들이 얻는 이익이 뭐가있냐는 얘기다.

◇ 묘안은 무엇인가 〓 당장 처방 가능한 묘안은 사실 없다. 지난 21일 열린 한국출판인회의에서 2시간반의 격론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못낸 것도 사안의 복잡성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온라인 서점에서의 가격을 이원화하자는 안이 보완책으로 나온다. 가벼운 읽을거리나 1년 정도 시간이 경과한 신간류에 한해 할인을 하고, 무거운 학술 교양서는 정가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보완책도 과연 실행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당장 최저가 보장을 내건 후발주자들이 이런 담합을 지킬지도 의문이다.

강한 바람을 타고있는 인터넷 열풍과 근사한 명분인 시장중심주의, 그런 와중 독자들의 입맛 변화라는 삼각파도 속에 출판계는 사활의 시험대에 오른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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